[목숨건 침투] 01 육사생도 시절 Ⅰ
[목숨건 침투] 01 육사생도 시절 Ⅰ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01.2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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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꿈을 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하여 안주하려는 욕망과 이상의 꿈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대부분’이란 범주 밖의 부류였나 보다. 육군사관학교(이후 육사로 칭함)에 입학한 이후 지금껏 그래 왔다. 대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에 진학, 3학년이 되자마자 부여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이유는 단지 축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했고, 축구 선수로는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공을 잘 찼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운동을 잘하고, 또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선생님과 주위 어른들은 한결같이 ‘승부 근성 있는 용감한 군인’이 제격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군인이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학과 실력이었다.

본래 육사는 1945년 12월에 설치된 군사영어학교가 전신으로, 남조선국방경비대사관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로 잠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48년 9월에 육군사관학교로 개명된 후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초창기에는 일제강점기의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복무했던 군인들을 입교시켜 단기 교육을 실시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시 휴교했다가 전쟁 중인 1951년 10월 경남 진해에서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로 개교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자 이듬해인 1954년 6월 서울 태릉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7년 3월에는 화랑대(花郞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화랑대는 본래 일제강점기에 지원병 훈련소였던 것이 광복 이후 국군이 창설되면서 군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입학시험

1954년 부여고등학교 앞에 있는 중정리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은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 이상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나는 하숙을 하며 다시 내 자신에게 모험을 걸었다. 영어와 수학은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고 국어·영어·수학·과학·역사 등 주로 육사 시험 과목 위주로 공부에 집중, 몰두했다. 다른 사람은 학교에서 가르쳐준 정답의 공부를 했지만, 나는 3군(육군·해군·공군) 사관학교 기출 문제집을 구입해 공부하며 출제 문제에 대한 유형을 익혔다.

1954년 12월, 육사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충남 지구 병사구사령부(지금의 병무청) 요원의 지원하에 육사 교관들이 파견 나와 충남 지역 응시자 시험을 실시했다. 1차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2차 필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나는 대전의 삼성초등학교에서 학과 시험에 응시했다. 최종 3차는 태릉 사관학교에서 체력 검정으로 300m 달리기를 비롯하여 팔 굽혀 펴기, 쪼그려 뛰기, 허리 굽혔다 펴기, 철봉 턱걸이 등을 측정했고, 면접은 구두시험과 인물고사를 치렀다.

 

합격

1955년 3월 1일 서울신문에 발표된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합격할 거라는 생각은 감히 못하고 서울대학교 공대 화공과 지원서를 접수하러 1955년 3월 1일 아침 대전역으로 향했다. 서울행 열차 개찰 전에 확인한 신문 가판대의 서울신문 광고란 230명 중 충남 지구 16명 합격자 명단에 13번째로 올라 있었다. 나의 눈을 의심하며 동명이인일 수 있다는 생각에 충남 병사구사령부로 달려가 생년월일을 확인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인재들 틈에 내가 끼었다. 부여고등학교에서 5명이 응시하여 내가 합격했다. 나는 서울행을 접고 가벼운 마음으로 부여행 버스를 탔다.

부여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학교 정문과 부여 곳곳에 ‘축 육사 합격’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발 달린 친구 선후배들 모두가 찾아오고 부여고등학교는 축제 분위기였다. 우등생도 아닌 나의 1949년 대전중학교 합격, 1952년 대전고등학교 합격, 1955년 육군사관학교 합격으로 부여군이 떠들썩했다. 혹시 빽으로 합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 빽 배경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나 같은 촌놈에게 무슨 빽이 있었겠나.

나중에 안 사실로 나는 합격생 230명 중 159등으로 간신히 육사 문턱을 넘어선 거였다. 시쳇말로 꼴등이나 다름없는 합격생이었다. 당시의 그런 나를 보고 장차 장군이 될 거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 면에서 최고위직 군인이 육군 중위였기에, 내가 예상하는 미래의 최고 계급은 중령이었다. 육사 입학에 앞서 나는 걱정이 앞섰다. 1년 선배 우등생들인 강길주, 임병수 중 강길주 선배가 1954년 12월 성적(成績) 불량으로 퇴교 당했는바 우등생이 아닌 이진삼이 졸업할 수 있을까 하는 여론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기별(期別) 호칭

내가 육사에 입교하기 전인 1955년 4월 27일, 육군본부에서는 재학 중인 생도의 기별 호칭을 변경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육사 창설일을 5월 1일로 하고, 군의 역사와 전통을 단절 없이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정규 육군사관학교 제1기생이 11기생으로 호칭이 변경되었다. 내가 정규 5기 입학 예정자이니까, 입학과 함께 15기생이 되는 셈이다. 정규 1기생들의 반발은 미루어 짐작이 갔다. 정규 1기생들에게 ‘1이라는 처음의 의미’는 어휘 그 이상의 상징성이었다. 특히 군인에게 있어 ‘처음’의 의미는 명예이고 자부심이다. 하루아침에 그 상징성을 상실하였으니 육사 내부의 혼란은 엄청났다. 1기부터 10기까지의 단기 과정과 4년제 대학(이학사) 과정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15기생으로 입학할 즈음에는 어느 정도 혼란은 가라앉았지만 정규 1기생, 아니 11기생이 졸업하기까지는 5개월여 기간이 남아 있던 터라 서운해 하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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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19-01-28 16:45:16
어릴때부터 남달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