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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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나는 칠갑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산정에서 능선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내리며 지천과 계곡을 싸고돌아 일곱 곳의 명당자리를 만들었다 하여 칠갑산이라 불리는 이 산은 ‘충남의 알프스’라는 이름만큼 산세가 거칠고 험준하면서 아름답다. 내가 자란 곳은 백제의 자주성과 저항의식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고란사, 낙화암, 부산서원, 자온대 등의 절경을 가진 백마강 인근의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111번지다. 집을 둘러싼 야산들이 병풍처럼 에둘러 있어 멀리서 보는 마을은 수묵화의 붓 터치처럼 정겹다.

마을의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는 당산(堂山) 앞 공터는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언제나 활기찼다. 그 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에 남보다 작은 키였지만 동작이 빠르고 다부져서 무슨 운동을 하든 으레 대표선수로 끼곤 했다. 축구, 육상, 평행봉 등 뭐가 됐든 지는 걸 싫어했다. 한번은 친구들과 백마강 백사장에서 씨름을 할 때였다. 애당초 덩치 차이가 크게 나서 이기기 어려운 상대였지만 마음먹고 시작한 터라 나는 이길 때까지 계속했다. 결국 나의 끈기에 두 손 두 발 안 든 친구가 없었다.

나는 3남2녀 중 장자로 태어났다. 비록 우등생은 아니었어도 부모님, 선생님과 동네 어른들의 애정과 기대가 매우 컸다. 공부보다는 운동을 잘하는 편이었으며 어른들께 예의 바르고 착하다는 평은 들었다.

“사람은 정도(正道)를 걷고, 경우에 틀리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받았다. 집을 떠나 금 캐는 광산 소장을 하셨던 아버지를 대신해 나는 어려서부터 심부름을 다녔다. 기억에 남는 것은 상갓집 심부름이다. 어머니는 어린 내게 상주에게 하는 “상사(喪事) 말씀, 무어라고 위로 드릴지 모르겠습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십시오.”라는 인사말을 일러주셨고, 나는 그 말씀을 상주에게 전하곤 했다. 그리고 나의 전언(傳言)은 마을의 유행어가 될 만큼 회자되었다. 가을에 낙엽이 쌓이면 모두 쓸어 담아 불을 지피고, 겨울에 눈이 내리면 집 앞과 길가의 눈을 치우는 일도 내 몫이었다.

부모님의 바람은 내가 대전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운동을 하느라 공부가 부족하고 나보다 공부를 잘하던 학생들도 떨어졌으나, 나는 합격했다. 어찌됐든 부여 촌놈인 내가 당시의 대전중학교에 합격한 것은 지금의 미국 하버드대학에 들어간 것보다 더 큰 경사로 마을 전체가 떠들썩했다. 지금이야 부여에서 대전까지 한 시간이면 갈 거리지만, 당시에는 새벽부터 서둘러 시간 맞춰 버스를 타고 논산까지 가서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나는 부여에서 대전으로 유학을 간 셈이었다. 하숙을 했고, 집에는 방학 때만 갔다.

대전으로 유학을 가긴 했으나 난 공부보다 운동이 여전히 먼저였다. 삼성동에 가서 대전공업학교 학생과 같이 복싱을 배웠고 더러 싸움질도 했다.

1950년 4월, 중학교 2학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교생이 영화를 보러 갔다. 제목이 ‘38선의 열쇠’로 북한이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38선을 통해 약 680회나 남한을 침범, 거기에 대응하는 우리 군의 모습이 주 내용이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북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북한으로 숨어들어간 우리 군 3명이 북한군과 맞닥뜨리면서 북한군을 사살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막연하게 꿈꿔왔던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두 달 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휴교령이 내려졌고 나는 고향인 부여로 피란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7월 중순이 되자 내가 사는 시골마을까지 인민군들이 밀어닥쳤다. 인민군들은 마을을 점령 후, 유지들을 친일파, 악질 지주, 매판 자본가, 반동 관료배 등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우리 가족은 마을에서 약 10km 떨어진 산속으로 숨었다.

그해 7월 말, 마을 곳곳에 붓글씨의 삐라(전단지)가 나붙었다. “때려잡자 김일성! 물러가라 인민군! 대한민국 만세!”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학교, 면사무소, 장터 등에 같은 전단지가 붙어 있자 내무서원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범인 색출에 나섰다. 마구잡이로 마을 사람들을 내무서(북한군이 점령 지역에 둔 치안기관)로 잡아갔다. 그 바람에 나도 친구인 방대현(전 중학교 교장)과 함께 잡혀갔다. 여러 날 동안 내무서원으로부터 협박과 쇠좆매(수소의 말린 생식기)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붓글씨를 써 보이고 전단지의 글씨와 같은 서체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친구와 나는 그 일을 학교 선배들이 했음을 알고 있었다. 이미 의용군에 자원해 나간 터라 이름을 알려준다고 해도 인민군들은 어쩔 방법이 없었을 테지만, 친구와 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만약 당시 내무서에서 친구와 나를 대전교도소로 넘겼다면 우리는 죽었을 것이다. 얼마 후, 인민군이 다시 북으로 도망갈 때 교도소에 있던 사람들을 죄다 죽이고 갔으니 말이다.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내게 구체적인 꿈이 생겼다. 전쟁이 일어나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던 정부가,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이로써 막연했던 내 꿈은 구체화되었고, 그것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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