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호 변호사 (前법무연수원장, 前대전지·고검장) / 뉴스티앤티

지난 3월 31일 금요일 오전 10시 포항에 있는 포스코플랜텍에 강의하러 가기 위해 신경주행 KTX에 몸을 실었습니다. 포스코플랜텍 조청명 사장과의 인연 때문에 하루 시간을 낸 것입니다. KTX 차장을 스쳐 지나가는 경치를 보고 있으려니 옛일이 함께 스쳐 지나갑니다.

2004년 가을 대구지검 차장검사 시절 직장교육의 일환으로 류경렬 포항제철소장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직장교육은 별 재미가 없는 법입니다. 그날도 큰 기대 없이 강의장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류 소장은 신기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포스코는 6시그마를 활용하여 혁신하고 있는데 그 성과가 대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검사가 되어 20년이 다 되도록 혁신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더욱이 6시그마는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습니다. 강의 내내 검찰에 6시그마를 도입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고민하였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당시 정상명 고검장 주최로 고지검 간부들이 류 소장과 같이 오찬을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류 소장에게 "6시그마를 검찰에도 도입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류 소장은 "물론 가능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이어 "대구지검이 6시그마를 도입하면 포스코 직원을 파견해 줄 수 있냐"고 당돌하게 질문하였습니다. 당연히 예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 만남을 계기로 검찰에 혁신과 6시그마가 도입되었습니다. 그 후 포스코의 혁신담당 임원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임원 중 한 분이 조청명 사장입니다.

이렇게 혁신을 만났습니다. 그 혁신경영은 훗날 행복경영으로 발전하였고 행복경영의 한 방법으로 2008년부터 월요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날 류경렬 소장의 강의가 없었더라면 월요편지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차창에는 봄비가 뿌려집니다. 드문드문 멀리 산수유가 핀 모습이 보이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봄꽃이 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먼 산은 죽음의 색깔을 벗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대구지검에 파견 나온 포스코의 김군역 차장은 대구지검 6시그마 리더들과의 첫 만남에서 혁신에 대해 강의를 하였습니다. "BC 12세기 주공(周公)이 저술한 주례(周禮)에 '가을에는 피(皮)를 거두고 겨울에는 혁(革)을 거둔다'라 했습니다. 즉, 가을에 짐승으로부터 털이 있는 상태로 벗겨낸 피(皮)를 거두고 피(皮)의 털을 다듬어 없애고 그늘에 잘 말리고 두드려서 겨울에 아주 부드러운 새로운 물질인 혁(革)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니 혁신이란 짐승의 털이 붙어 있는 껍질 자체를 잘 다듬어 옷을 만들 수 있는 가죽으로 만드는 과정을 말합니다."

원뜻은 이렇지만, 대부분은 "혁신은 예리한 칼로 껍질을 벗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동물의 털가죽을 다듬는 혁신의 어원은 사라지고 껍질을 벗겨 새로운 사람, 새로운 조직으로 태어나게 한다는 뜻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또 ’껍질을 벗긴다’는 표현은 ’뼈를 깎는다'는 표현과 어우러져 혁신의 상징적 표현이 되었습니다.'[뼈를 깎는다'는 표현은 중국의 명의 화타가 독화살을 맞은 관우의 뼈를 깎아내 치료하였다는 '괄골요독(刮骨療毒)'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장한 각오로 문제를 해결할 때 쓰입니다. 이러니 '뼈를 깎는 각오로 혁신하자'는 표현이 자주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 껍질을 벗기고 뼈를 깎는 것이지 얼마나 살벌한 표현입니까? 혁신을 해보니 구성원들은 혁신을 하기도 전에 혁신이라는 말에 주눅이 듭니다. 또 껍질을 벗기고 뼈를 깎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CEO는 늘 혁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는 직원들은 무덤덤 하지요. "또 올 것이 왔구나. 이번에는 어떤 단어로 포장하려나. 변화, 혁신, 개혁, 창조, 쇄신, 이제는 더 이상 써먹을 단어도 없지 않을까. 조직 개편하고 컨설팅 받고 새로운 혁신 기법 도입하고 개선안 내라고 닦달하겠지. 그러면 몇 년 전에 고민하다가 책상 서랍에 넣어둔 아이디어 몇 개 내놓으면 갑론을박하다가 시간은 흘러갈거야. 아하, 이놈의 혁신 소리 안 듣고 사는 날이 오려나."

사실, 누구나 인생이나 직장에서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그런데 혁신에서 사용하는 '껍질을 벗기고 뼈를 깎는다' 등의 표현이 살벌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이 생기는 것입니다. 좋은 표현을 써도 혁신이 힘들 텐데 이런 표현을 들으면 그 자체가 싫기 마련입니다. "그래 알아서들 해라.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련다. 가만히 있다가 죽으나, 껍질 벗겨지고 뼈가 깎여 죽으나 매한가지 아닐까? 껍질 벗기고 뼈를 깎으면 좋아진다지만 나는 끔찍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내 껍질과 뼈를 온전히 보존하고 싶어."

KTX를 타고 가면서 문득문득 든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혁신추진단장으로 일할 때는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혁신에 동참하지 않는 조직원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동참시킬 수 있을까만 생각하였습니다. 혁신을 둘러싼 표현들이 주는 반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KTX는 동대구 역을 지났습니다. 이제 20분 후면 신경주역입니다. 여전히 봄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차장의 경치는 북부지방과는 사뭇 다릅니다. 산 색깔도 제법 파릇파릇합니다. 봄이 살아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죽었던 것 같은 대지가 소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생(蘇生)' 겨울에는 들어보지 못하였던 표현입니다.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소생의 뜻입니다. 따뜻하고 희망찬 표현입니다. 소생하면 봄, 새싹, 움트다, 생명, 기쁨 등이 함께 떠오릅니다. 문득, 혁신 대신 소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벌한 표현들이 연상되는 '혁신'보다 희망찬 표현들이 연상되는 '소생'을 활용하여 변화를 유도하면 어떨까요. 사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보다 더 기적적인 변화가 어디에 있을까요. 

***[편집자 주]이 글은 조변호사께서 지난 4월 3일자에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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