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눈빛이 종이보다 희길래 / 말채찍을 들어서 내 이름을 써 두었네 / 바람이여 이 눈바닥 휩쓸지 말고 /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게 – 이규보(1168-1241) 한시 ‘설중방우인불우’ 전문

연말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 이르면 누구나 ‘세월과 나이, 시간’ 같은 낱말을 떠올린다. 해와 달은 뜨고 지고, 울고불고 환호작약 하더라도 한 살을 더 먹게 되니 감상에 빠지는 것이다. 바다에 배 지나간 흔적 없고 청산 역시 학 나른 자국 없지만 사람의 몸과 맘에는 생채기가 남는다. 산다는 것은 얼마간의 대가를 지불하는 법. 육신과 정신 그 어디에라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망년’이 일본식 표현이라지만 송년회보다 망년회가 어울리는 시대가 있었다.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산업화와 도시화의 새마을 운동에 내몰렸던 6-70년대 말이다. 1년에 단 하루 그날만큼은 실컷 먹고, 마셔도 용서 받는다고 믿었으리라. 이제 80년대 민주화를 거쳐 소확행과 미닝 아웃Meaning out을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뼈와 살을 축내며 죽어라 일한 기억 없는 ‘행복’한 나날이니 잊는 해가 아니라 그저 흘려보내는 한 해로 여긴다.

13세기 고려의 문제적 인물 이규보. 심의(1475-?) “기몽”에 등장하는 선계 시의 왕국- 그 나라의 임금이 최치원이었는데 수상은 을지문덕이고, 이제현과 이규보가 각각 좌우상을 맡고 있었다. 살아생전 7-8천 수의 시를 남긴 백운거사는 기실 그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는 절세의 문인이었다. 하지만 최씨 무신정권에 빌붙어 호의호식했으니 어용시비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당시 주필이당백에게는 35살이나 많은 ‘친구’가 있었다.

오세재(1133-?)는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구속을 못 견디는 자유분방한 성정 탓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칼날의 권력을 비판하며 해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술과 시에 빠져 일생을 보냈다. “주역”을 암송하고 “육경”에 통달한 덕전은 9살 무렵 고려의 신동으로 알려진 이규보를 끔찍이 아껴 훗날 친구 맺기를 허락했고 각별하게 지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연종의 이맘때 오후였을 것이다. 이규보는 심중의 울화를 풀어볼 겸 말을 달려 35살의 연상인 오덕전을 찾아갔다. 세상 사람들이 곡학아세의 벼슬아치라 손가락질해도 ‘절친’ 그는 나를 이해하리라. 어쩌면 둘이서 조촐한 망년회를 보낼 셈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이를 잊고 친구가 되었으니 진정한 망년의 회동이다. 하지만 벗은 출타 중이었고, 날이 저물어가자 대문 앞 눈밭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망년지우 이규보 다녀가요!

연종환원은 복을 맞는 일이나 불교를 숭상하는 단서이다. 요사이 부처를 섬기는 일은 폐지하여 거의 없어졌는데 다만 선왕 선후의 기재는 이를 차마 페지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 번거로움을 덜어 버렸다. 이것은 과인의 복을 얻는 이치가 있더라도 오히려 비루함이 될 것인데 하물며 그런 이치도 없는 것이라. 이를 폐지하는 것이 어떠한가? -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 12월 13일

통치이념이 유교인 국가에서 불교의 관례는 죄다 없애야 하리라. 그러나 종묘의 국사급이니 조정의 대신 그 누구라도 감히 상소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마침내 세종이 이를 거론하고 나서자 변계량이나 원숙, 김익정 모두 ‘임금의 마음으로 결정하실 일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로써 세종은 그해부터 사찰에서 복을 비는 일을 금하고, 다만 중악과 하악에서 올리는 산제만 허용했다.

그런데 이 연종환원年終還願의 뜻이 참으로 웅숭깊다. 해마다 연초에 왕의 복을 비는 원장을 작성하여 부처에게 올리고, 연말에 다시 빌고 그 원장을 가져오는 일- 오늘날 여러 정부 부처와 단체, 회사의 종무식이나 시무식과 흡사하지 않은가? 가정과 개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새해 초에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여 세밑에 성과를 되새겨 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연종회’는 송년과 망년회를 아우르는 참뜻이 담겨 있다. 한 해를 잊거나 보내는 일 모두 보다 나은 새해를 위한 의례라면 마감한다는 연종이 더 알맞은 표현이다. 1년을 돌아보고 반성과 회한 속에 분발과 기대 부푼 미래를 다짐하는 뜻에서 말이다. 그 어느 편이든 연말 회동의 풍속도가 달라졌다. 번잡하고 요란스런 저녁보다 맛집의 점심상으로 만나고, 영화관과 연극무대를 찾는 경우도 많아졌다. 몇몇 회사는 소외된 사람들과 김장을 담그고, 연탄을 배달하는 봉사를 한다는 뉴스다.

해와 달은 천천히 가려 하지 않고 / 네 계절은 재촉하며 다그친다 / 찬바람이 마른 가지에 스치니 낙엽이 밭길을 덮는구나 / 약한 체질이 세월과 더불어 늙어버려 / 까맣던 귀밑머리가 일찌감치 벌써 희어졌다 / 백발이 사람의 머리에 꽂히니 / 앞길이 점차 좁아져 간다 / 집은 잠시 머무는 여관이요 / 나는 장차 떠나려는 나그네 같구나 / 떠나서는 어디로 가려는가 / 남산에 옛집이 있다네 – 도연명(365-427) ‘잡시’ 제7수

해매다 이즈음이면 톺아보는 한시. 훗날 당대의 이백이 ‘춘야연도리원서’에서 ‘천지라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고, 우리 사는 세월이라는 것은 영원 가운데 잠시 지나는 나그네이다’고 읊은 시구의 저본이다. 그렇다. 스스로 돌며 밤낮의 하루를 만들고, 해를 크게 한 바퀴 돌아 1년을 만드는 지구라는 행성의 사람들- 송년이나 망년, 연종회 끝나면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 터 또 한 해가 간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나 세월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흐르는 세월에 나눈 눈금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의 친구 혜시의 정언일 것이다. “한 자 길이의 채찍도 매일 반씩 잘라 버린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1959년 기해년 출생으로 회갑의 문턱에서야 혜시의 속내를 어렴풋이 깨치니 나도 참 아둔한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자의 채찍 그 한뉘를 영원한 것으로 살아야 한다. 한없이 무한한 우주라는 채찍- 눈금 매기고 한 해가 또 간다고 조급하거나 미련을 둘 일이 아니다. 그저 그냥 하루를 무한하게, 영원한 하루처럼 살아갈 일이다.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