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지금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기쁨보다도 곱절이나 더한 부끄럼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 부끄럼은 같은 길을 택한 많은 선배님들에게 대한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밖에는 표현하지 못하는 새별이의 아름다운 마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담당 문화부 박기자입니다.” 송수화기를 잡은 왼 손이 짧게 경련을 일으켰다. 39년 전의 12월- 그러니까 1979년 12월 20일 목요일 오후였다. 첫눈이 채 녹지 않아 질척한 골목길을 걸어 귀가했더니 어머니께서 신문사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를 건네셨다. 나는 혹시 하는 기대감을 억누르며 안방의 백색전화기 다이얼을 돌렸다. “축하드립니다. 200자 원고지 3장 분량으로 당선소감 써서 24일 내로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5층으로 오십시오.”

1929년 3월 16일생인 모친께 많은 은혜를 받았다, 나는. 생모의 신앙으로 어린시절부터 장로교회를 다녔다. 외동은 우체국장이셨던 부친을 따라 자주 이사하면서 초등학교 입학 후에도 네 번이나 전학을 했다. 그런 까닭에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늘 낯선 환경에 내몰렸지만 교회는 가정 이상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모친께서 쥐어준 헌금을 내고, 성경책을 읽고, 찬송가를 불러대던 시절- 녀석은 자신 이름이 붙은 벽의 포도송이에 파란색이 칠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들과 산길의 숫눈을 밟으며 성탄절 새벽송을 돌던 그 유년의 뜨락은 참 따뜻했고 행복했다.

아들은 부활절이나 부흥회, 크리스마스 따위의 교회행사 때면 늘 역할이 주어졌다. 일종의 ‘개식선언’이나 성경봉독, 기도 같은 임무를 수행하며 교우들과 어울려 혼자라는 집안의 외로움을 잊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문학과 음악적 소양이 쌓아졌으리라. 거기에 1960년대 정보와 금융의 허브였던 우체국은 나의 놀이터였다. 국장 옆자리의 작은 의자에서 전보를 치고, 시외전화를 걸고, 소포를 부치고, 돈을 찾고 넣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던 것이다.

동심童心에는 과거와 현재가 다를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리이며 세상을 향하여 내보이는 부끄럼 없는 몸짓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동심이 없는 세상에서 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니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쓴다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끄럼이 곱절이나 앞서는 기쁨이나마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선選의 영광을 베풀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깊은 감사를 드리며 동아일보사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정진하겠습니다. - 1980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부문 가작 당선 “하늘 땅땅만큼 좋아해요‘ 입선소감

불과 200자 원고지 세 장이지만 ‘진리와 구원, 사랑’이 적힌 단문은 당시 20살 국문과 대학생의 ‘부끄러운 무의식’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훗날 이런 상황을 웅숭깊게 석명한 글을 만났는데 바로 미셀 푸코(1926-1984)의 “말과 사물”(이광래역. 1987년. 민음사)이었다. 요약하면 ‘기독교의 고해성사에서 비롯된 자기의 서사narrative of self 쓰기는 근대적 성찰의 가장 핵심적인 형식’이다.

표상과 존재가 만나는 장소, 자연과 인간본성이 교차하는 장소, 우리가 원초적이며, 논파할 수 없으며 불가사의한 인간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게 된 바로 그 장소에서, 고전주의적 사고가 나타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언설의 힘이다. - 미셀 푸코 “말과 사물” 제9장 ‘인간과 그 분신’

말이 글보다 먼저 있었다. 신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했고, 몇 백억 년이 지난 뒤에야 등장한 인간의 글 역시 말에서 생겨났다. 입말과 글말- 이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근원으로 어느 한편의 우월을 따질 수 없는 동체이명이자 양성구유Androgyny적 소여다. 푸코 식으로 표현하면 ‘언어에로의 회귀’가 곧 인간성의 회복이자 근대정신의 발현인 것이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말과 글’로 체현된다. 사람은 사람과 자연에게서만 배우는 법. 사람보다 더 많은 자연의 말에 귀 기울이고, 더불어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이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부분

김수영(1921-1968)시인이 25살 되던 해인 1946년에 발표된 ‘공자의 생활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로 시작하는 이 시는 난해성과 조잡성 논란 속에 데뷔작으로 꼽혀왔다. 그런데 무엇보다 ‘사물’을 바로 보고, 따지며 죽을 때까지 시를 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굳이 비견해보면 노자의 “도덕경” 제38장을 실천하는 ‘시인’이 되겠노라는 선언이다.

부처기후 불거기박 처기실 불거기화 고거피취자- 대장부로서 두터운 것에 거주하고, 야박한 것에 거주하지 않으며, 열매에 거처하고 꽃봉오리에 거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왕필은 이 경구를 다음과 같이 풀었다. “사사로움을 멸하고 자신을 비우면, 온 천하가 우러러보지 않음이 없고, 멀거나 가깝거나 이르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보면 제목이 ‘공자’가 아니라 ‘노자의 생활난’이 더 어울린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저마다 수많은 ‘언설’ 속에 매조지 된 일도 있고, 해를 넘기는 과제도 많다. 그러나 이즈음이면 밤을 지새며 자신만의 ‘언설’을 가다듬는 축들도 많다. 바로 신춘문예 응시생들이다. 행정이나 사법, 의사 고시는 일생의 ‘밥차’에 동승하려는 노력이다. 반면에 ’신춘고시‘는 오히려 궁핍과 빈한한 역으로 가는 버스의 ’승차권‘을 얻기 위한 열망인지도 모른다.

수영시인은 47살 되던 해인 1968년 6월 15일 밤 좌석버스에 치여 다음날 아침 8시 50분에 절명했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풀’이 그렇게 스러진 것이다. 거제도포로수용소를 나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회두리에 닭을 길렀던 가난한 시인은 그 어느 의사나 판사, 검사보다 오래 기억될 것이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목마 타고 떠난 수영시인을 찾고, 가슴에 보듬고 살아가리라,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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