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사적공원 남간정사

대전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 (1989. 3. 18 지정), 대전 동구 가양동 65번지


이곳은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선생이 '흥농서당(興農書堂)'과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세워 많은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며 병자호란때의 치육을 씻기 위한 북별책을 강구하였던 곳으로 정절서원(靖節書院)과 우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종회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낮은 야산 기슭에 남향하여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 후기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해설사/ 백남우]

남간정사는 우암 선생이 별업(別業)이자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간이다.

남간정사는 우암 선생님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우암 선생은 옥천에서 태어나고, 8살 때 동춘당 선생과 1년 정도 대전에 있었다. 그리고 결혼 후 동춘 송준길 선생의 요청에 대전으로 이사 왔다.

그 당시 천년의 강학 터를 잡은 곳이 이곳 흥농서당이었다.

이곳 흥농서당 한 칸에 제실을 붙여 남간정사라 했고, '남간정사'라는 것은 학교다.

'남간'은 응봉남간 주자(朱子)에서 시에서 따오고 주자 선생 생각이 우암 선생과 같기 때문에 우암을 주자 방정식이라고 한다. 우암은 주자와 통한다.

주자 선생의 뜻을 따르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한 공간이 바로 남간정사이다.

 

선생은 소제(동구 소제동)에 살면서 흥농촌(興農村)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能仁庵)이라 하였고, 그 아래 남간정사를 지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는 한편, 그의 학문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남간정사는 계곡에 있는 샘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이 건물의 대청 밑을 통해 연못으로 흘러가게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정원조경사에 있어서 하나의 독특한 경지를 이루는 훌륭한 조경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설사/ 백남우]

또한, 남간정사는 우암선생이 정읍에서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초빈(草殯) 장사(葬事)를 치룬 곳이다. 명성왕후께서 내리신 수의(壽衣)를 갈아입히고 관을 바꿔서 반천(半天)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남간정사는 불 타 정조때 증축한 것이다. 여기서 송자대전(宋子大全) 목판이 다시 발간 되었다.

송자대전은 정조 때 왕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화양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 강점기에 소실되었다. 1929년 선생의 후손과 유림이 다시 간행하였다. 그 송자대전 목판이 대전시 유형문화제 1호로서 보관되어 있다.

'부끄러울 치' 우암 선생이 쓴 글씨. 우암 선생은 큰 글씨에 능하다. 큰 칡으로 쓴 글씨로 뜻은 복수 설 '치'다.

병자호란때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두 왕자가 삼양으로 끌려가고 돌아온 두 왕자 중 봉림대군이 효종임금에 이른다. 효종임금은 북벌을 꿈꾼다.

자기의 스승 우암 선생과 북벌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써 마음에 새겼다.

 

선생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우암은 그 호이다. 인조 때 생원시험에 합격한 이후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남간정사와 소재동에서 옮겨온 기국정(杞菊亭) 등이 남아 있고, 선생의 문집인 송자대전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남간사(南澗祠)를 다시 세우고 주변을 새롭게 정비하여 우암사적공원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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