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누구나 ‘새’가 되는 11월
[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누구나 ‘새’가 되는 11월
  • 김래호 작가
  • 승인 2018.11.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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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나희덕(1966- ) 시 ‘11월’ 전문

봄꽃 피었다 들레고, 덥다고 피서지로 들꾀다 보니 어느덧 십일월이다. 저마다 사정이 어떻든 시간은 세월은 쏜살같이 물처럼 사람을 흐르게 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자비와 잔인에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사히 여긴다, 나는. 큰 잘못이나 허물없이 무던히 살아내 지금에 이르렀구나. 아! 거기서 그때 좀 더 최선을 다 할 걸. 반성과 회한이 앞서지만 슬며시 혼자웃음 지으며 즐거운 회억에 젖는 11월인 것이다.

인도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명상가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는 시간을 ‘인간의 심리적인 적’으로 규정하면서 ‘생각이 곧 시간’이라고 정언했다. 그렇다. 시간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빠르거나 느리고, 길고 짧고, 많고 적기도 하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그 불가역성에 의해서만 공간과 구분된다. 일정한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이론적으로 언제나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 갈 수가 없다. 시간과 공간은 칸트 식으로 인간의 선험적인 요소로 각자의 의식 여부에 따라 다르게 체험된다. 하늘과 땅, 사람의 삼재처럼 인간은 공간과 시간과 더불어 삼간의 한 소여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천지인과 시공인- 그 ‘사이’에 사람이 산다. 짜장 그런 사이를 벌려 틈과 짬을 내는 것은 아닌지.

달력은 시간의 비가역성을 얼마간 제거한 빛나는 발명품이다. 24시간을 하루로, 7일을 한주로, 한 달을 30이나 31일로 무한의 시간을 유한의 순환으로 치환해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명료하고 편리한 방식인가? 현재의 태양력은 로마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윤년을 도입해 1582년에 제정했다. 이전에는 율리우스달력을 썼는데 그는 10달, 304일이던 1년의 고대 로마 달력을 이집트 태양력을 수용하면서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기원 전 1세기의 일이었다.

원래 로마는 지금의 3월에 시작해 10월이면 한 해가 끝났었다. 그런데 새해에 집정관으로 취임 예정이었던 율리우스 케사르는 조급증에 당시 11월을 1월로 선포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두 달씩 월 이름이 밀려나게 된다. 권력을 잡은 자는 시간도 지배하는 법. 그러면서 7월에 율리우스JULY- 자신의 이름을 붙였고, 후계자인 아우구스트스 역시 8월을 자신의 달로 만들었다. 그런데 8월이 작은 달이어서 원래 29일이던 2월에서 하루를 가져와 큰 달로 만들어 케사르와 대등한 위상을 과시했다.

11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vember는 9nine 을 의미하는 라틴어 ‘novem’에서 유래했다. 11월이 고대 로마 달력에서는 9번째 달이었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여전히 양력보다 40여 일 뒤쳐지는 음력을 아울러 쓰고 있다. 지구가 해를 크게 한 번 도는 1년과 달이 지구를 한차례 도는 1달의 차이 때문이다. 여기에 윤달과 윤년을 두어 해의 일년과 비슷하게 날짜를 맞추어 간다.

11월은 참 심심한 달이다. ‘빨간’ 날도 없고, 양의 숫자가 겹치는 중일명절 그러니까 1.1의 설, 삼짇날의 3.3, 5.5의 단오, 칠석의 7.7- ‘이름 있는 마디’ 그 명절도 없다. 8월 15일 한가위와 9.9의 중양절을 큰 명일로 여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해 농사일 조상께 감사하고, 서리의 가을에 국화꽃을 보면 1년이 다 간 것이다. 추상이라 하거늘 365일 어떻게 올곧고 튼실하게 살았는가 심판관 앞에 서는 일만 남았다.

사람이 이 천지 사이에 살고 있는 시간이란 마치 준마가 벽의 틈새를 언뜻 지나가듯 순식간이오. 사물은 모두 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서 다시 변화에 따라 죽소. 변화하여 생겨나는가 하면 다시 변화하여 죽는 거요. 이것을 생물이나 인간은 애달파하고 슬퍼하오. 죽음이란 활집이나 옷주머니를 끄르듯이 하늘에서 받은 형체를 떠나 몸도 함께 따라 무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도道로의 위대한 복귀이지요. - “장자” ‘지북유’ 제10

노자가 공자에게 석명하는 장면인데 훗날 진일이라는 현자가 제지현해帝之縣解’ 네 글자로 축약했다. 하늘에서 묶어 매단 밧줄이 풀리는 게 출생이고 다시 걷어 올리는 게 죽음이라는 뜻이다. 진일은 노자가 영면하자 문상을 가서 형식적으로 곡 세 번만 하고 나와 버렸다. 그러자 제자가 조심스레 여쭈었다. 살아생전 선생의 벗이었는데 좀 소홀하신 것 아닌지요? 무슨 소리 가족 모두가 생사의 본분을 잃고 저리 곡을 그치지 않으니 몹시 언짢네. 둔천지형遁天之刑- 하늘의 뜻을 거절하면 저리 형벌을 받아 울게 된다네. (“장자” ’양생주‘ 제9)

이런 곡진한 뜻을 우언과 중언, 치언의 달인 장자가 기막히게 포착했다. 바로 ‘양생주’ 제10의 끝 문장이다. “손가락이 장작 지피는 일을 다 하면, 불은 계속 타고, 결코 꺼질 줄 모른다.” ‘장자“ 전편 중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인데 주석자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여기에 곽주의 해석을 소개한다. ”불이 한 곳에서 다 타도 곧 다음으로 옮겨가고, 사람의 삶도 현세에 그쳐도 미래로 이어짐을 속인은 깨치지 못한다.“

새는 하늘과 땅 ‘사이’를 좁히느라 무진장 애쓴다. 두 날개를 펼치고 빈 뼈의 몸뚱이를 쉼 없이 띄운다. 하지만 천지는 여전히 그만큼 벌어져 있고 매양 두 발의 지상으로 귀환해야만 한다. 새들은 죽어서도 솟대에 올라 천상과 지상을 살핀다. 나는 그 누가 있어 세상에 다시 나가라면 새가 되겠다고 답할 것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사람마다의 ‘그승’이 있다. 그승의 불사조는 삼세시방- 그 어디라도, 무엇에라도 날갯짓하며 날아갈 수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나희덕 시 ‘11월’ 부분

11월이면 우리 모두 ‘새’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오래된 미래- 그 죽음의 고통과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저, 그냥 하늘과 땅 ‘사이’를 나는 새의 눈동자로 살아갈 일이다. 문마저 열리지 않아 사이가 없다면 우리는 세월이라는 준마를 보지 못한다. 문틈 그 사이로 달리는 것이 준마인가 나인가? 만산홍엽-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단풍 들어 불타는 산을 나는 산새에게 물어본다. 도대체 내가 꿈에 새가 되었을까? 아니면 새가 꿈에 내가 된 것일까? 사람과 새 모두 ‘나는’ 존재들이다. 11월 초입에서 거듭 재삼 자문해 본다. 나는 그 누구이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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