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재아는 인仁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난 연후에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다. 대체로 3년 상은 천하에 공통된 상례이다. 재아도 그 부모에게서 삼 년간의 사랑을 받았겠지? - 공자 “논어” 제17편 ‘양화’ 21

작년 초가을 이맘때 어머니께서 자리보전을 시작하셨다. 말수가 줄어들고, 눈을 감았다 한참 뒤에야 뜨시며 때때로 아들과 손자를 몰라보셨다. 폭설이 엄습해 노거수를 쓰러뜨리듯 노환이 급격하게 진행된 것이다. 50여 년 전 어머니는 나처럼 아들을 내려다 보셨으리라. 환치 그 절절한 자리바꿈의 순환에 뵐 때마다 눈시울이 적셔졌다.

그러시다가 11월 22일 소설에 88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 몸과 마음 내어주시고, 이름 짓고, 삶의 근터리를 보살펴주신 나의 엄마. 천둥벌거숭이를 사람 만드신 노고에 대한 위무와 자책이 밀려든 3일 간의 장례. 쉰 살 되던 해 생일에 지난 49해를 잘못 살았다 자탄한 거백옥 그 반성과 근신의 화신이 환생해 내내 머물렀다. 공구는 위나라 대부였던 그를 진정한 군자라고 치켜세웠다.

공문십철- 중니 문하의 뛰어난 10명의 제자를 말하는데 자공과 자로, 증자 같은 이들이다. 그런데 스승은 언변이 뛰어난 재아, 자공과 자주 대거리를 벌렸다. 어느 날 재아가 선생께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즉답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우물 속에 인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우물로 따라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렇게 하겠느냐? 군자는 가 보게 할 수는 있어도 우물에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속일 수는 있어도 사리 판단조차 못하게 할 수는 없다.“ -”논어“ 제6편 ‘옹야’ 24

늘 이런 식으로 토를 달며 선생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종당에 공자는 재아가 ‘인’하지 못한 작자라고 대성일갈하는데 주제가 부모상이었다. 찬수개화- 묶어 보면 1년이면 묵은 곡식은 다 없어지고, 불씨를 얻는 나무도 다시 처음의 나무로 돌아오니 3년 상례는 너무 길다는 논지였다. 그러자 공자는 한심하다는 투로 묻는다. 쌀밥과 비단 옷을 입는 것이 정녕 너에게는 편안하더냐? 재아가 물러나지 않고 그렇다 답하자 스승은 조근조근 해명했다.

군자가 상을 치를 때는 입맛이 없고, 음악도 즐겁지 않고, 집에 있어도 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거늘 네가 편하다면 1년 상만 치르도록 해라! 상례고 뭐고 네 마음대로 하라는 질타였다. 제자들은 그저 고개를 처박고,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대질심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재아가 얼굴을 붉히며 방문을 열어젖히고 나가버렸다. 한차례 한숨을 내쉰 스승은 이윽고 저 자도 부모님께 무한한 3년간의 내리사랑을 받지 않았겠느냐며 혀를 차기에 이른 것이다.

“논어” 전편에 걸쳐 가장 치열한 논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굽히지 않는 재아의 실리주의, 공리주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광경이다. 그런데 훗날 공자는 그런 재아 때문에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실토한다.

재아가 낮잠을 자고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가 없다. 재여에 대해서 무엇을 꾸짖겠는가?" 이어서 ”처음에 나는 사람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는 그의 행실을 믿었는데, 이제 사람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도 그의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다. 재아로 인해서 이를 바꾼 것이다.“고 이르셨다. - ”논어“ 제5편 ‘공야장’ 9

교학상장, 효학반- 천하의 공자 역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인仁과 정명正明’ 사상을 확립해 나갔다. 재아가 그렇지 못하다한 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손함, 너그러움, 미더움, 민첩함, 은혜로움’(‘양화’ 191)인데 “평소에 지낼 때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경건하며, 남과 어울릴 때는 진심으로 대하는 것”(‘자로’ 19)이다. 정명은 명칭과 실질이 부합하는 것으로 말과 행실의 일치와 이름값에 걸맞은 마땅한 명분이다. 이런 정명과 인을 일상에서 성찰해야 하는데 가정은 그 평생교육의 터전이다.

무명無名 천지지시天地之始 유명有名 만물지모萬物之母.(노자의 “도덕경” 제1장)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과 가없는 광대무변의 공간에 ‘이름’ 하나 얻는 게 사람의 출생이다. “열자”는 세상 가장 즐거운 일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현생의 인간이 내세에 또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눈 먼 바다거북이 100년에 한 번 바다 위로 고개를 내밀어, 그 위를 떠다니던 구멍 뚫린 나무판자에 목이 끼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초기 불전 “잡아합경”)

기실 입말이 글말보다 앞선다. 조물주는 세계를 명명함으로써 창조했고, 훗날 글로 남겨졌다. 사람 역시 구어로 시작해, 문어로 자신의 속내를 확연히 드러낸다. 여기에서 공자의 3년은 말과 글의 실상을 깨치는 사람됨의 최소한의 기간이다. 사람으로 보다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내리사랑이 어찌 1년이나 3년에 그치겠는가? 평생 못 갚을 그 은혜를 최소한 기려야 한다는 뜻도 함축된 3년 상례일 것이다.

이름은 ‘이르다’가 어원이고 그 명사형임이 분명하다. 소여의 존재 그 모두가 이름을 갖는다면 지칭하는 대상에 적확히 다다르고, 이르러야 이름값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과연 갓난애가 자신과 이름을 동일시하는 시기는 몇 개월, 몇 세쯤일까? 누구나 세상 나와 처음 울었던 그날의 날씨를 모른다. 부모나 일가에게 들어서 알게 되는데 나를 부르는 부모의 음성에 고개 돌린 날 역시 마찬가지이다. 치매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그것들조차 죄다 잊는 ‘해방과 방면’의 마지막 수고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강들이 흘러 이름과 형태를 버리고 바다에 잠기듯이 그렇게 지혜로운 이는 이름과 형태에서 벗어나 높고도 높은 성스런 인아purusa에게로 다가간다. - “문다까 우파니샤드” 경구

그렇다. 천 리 물길의 금강은 상류에서는 적벽강, 양강 하류에서는 웅진강, 백마강으로 불리며 황해로 흘러간다. 우리 일생도 강처럼 새로운 이름을 얻어가며 살다가, 회두리에 다 잊고 죽음, 그 고요의 바다로 가는 것이다. 가족들의 웃음꽃에 피었다가, 지며 눈물바다 속에 떠나는 한뉘. 기독교의 요단강과 불가의 삼도천, 그리스신화의 레테의 강 그 망각의 물길도 모두 강이다. 이녁들이여! 그대의 강은 잘 흐르고 있는가? 깊어가는 이 가을에 안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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