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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4당 대표의 인연.
(중앙=故 노무현 전 대통령, 시계방향으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 뉴스티앤티

지난 2일 열린 바른미래당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후보가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4당 대표와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연이 새삼 회자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두말할 것 없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친노진영의 좌장 그리고 중심축이다. 지난 1988년 13대 총선에서 각각 DJ가 이끌던 평화민주당(평민당)과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여의도에 처녀 입성한 두 사람은 1989년 우리나라 최초로 열린 청문회에서 각각 광주특위와 5공비리특위에서 맹활약하며 국민들의 시선을 모은다. 노 전 대통령이 1990년 YS의 3당 합당을 거부하고 이기택·박찬종·제정구·이철·김광일·장석화·김원웅 의원 등과 꼬마민주당에 잔류하여 부산에서 지역구도 장벽에 가로막혀 계속 낙선되면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반면, 이 대표는 13대 총선 당선 이후 서울 관악을에서 내리 5선을 하며 정치적 浮沈(부침)을 겪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과 이 대표의 관계가 더욱 무르익은 시점은 2004년 17대 총선 이후 치러진 열린우리당 초대 원내대표 경선에서 천정배 의원에게 패한 이 대표를 국무총리로 지명하면서부터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헌법상 보장된 국무총리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며, 이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역대 정부 사상 최초의 실세 국무총리의 역할을 하면서 ‘노무현-이해찬 공동정부’라는 말까지 만들어낸다. 또한 이 대표는 참여정부 당시 6살 연상인 노 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유일하게 맞담배를 피울 수 있을 만큼 격의 없이 지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노무현의 남자’에서 현재는 대척점에 있는 한국당의 구원투수로 영입되어 과거 동지들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 국민경선 당시 많은 대학 교수들이 대세론을 형성하던 이인제 후보 캠프에 합류하여 정책 등을 입안할 때 김 위원장은 경선 패배가 유력해보이던 노무현 후보의 정책자문단장으로서 정책을 총괄 지휘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는다. 김 위원장은 노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대통령인수위원회 정무분과위원회 간사를 거쳐 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참여정부에서 ‘노무현의 남자’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김 위원장은 지난 2006년 7월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당시 한나라당의 논문 표절 의혹 공세로 인해 취임 한 달여 만에 불명예 퇴진하고 만다. 자신을 낙마시켰던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의 구원투수로 영입된 김 위원장은 보수 재건에 열을 올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4당 대표 중 노 전 대통령과 가장 소원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YS에게 발탁되어 정치입문을 했으나, 손 대표는 YS가 3당 합당한 이후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자신의 대권 진출을 번번이 가로막았던 ‘주홍글씨’로 남게 됐고, 노 전 대통령은 YS의 통일민주당에 영입되어 13대 총선에 당선됐으나, 1990년 3당 합당에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YS와는 대척점에 서게 된다. 손 대표는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화세력의 대통합을 이루어낸다는 명분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으나, 노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 대표를 향해 ‘보따리장수’라고 비난하게 된다. 이에 손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을 향해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맞불을 놓으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고 만다. 2009년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손 대표는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조문하면서 살아 있을 때 쌓인 앙금을 씻는 계기로 만든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는 참여정부의 황태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이제는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과 소원해진 관계에 해당한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 당시 마지막까지 경선을 완주하며 노 전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준 정 대표는 천정배·신기남 의원과 더불어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고 2004년 초대 당의장에 선출된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역풍 하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22번으로 출마한 정 대표는 선거를 보름 앞두고 “어르신들은 투표를 안 하고 집에서 쉬셔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분들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젊은이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걸려있기 때문에 투표를 꼭 해야 합니다”라는 노인 폄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며 언론에 집중 부각되면서 당은 과반수 이상인 152석을 확보하나, 정작 본인은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해 8월 노 전 대통령은 무관인 정 대표를 부총리 겸 통일부장관으로 임명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며 참여정부 황태자의 길을 계속 걷게 해준다. 하지만 정 대표는 2006년 열린우리당으로 컴백하여 당 의장으로 민선 4기 5.31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했으나,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신촌유세 테러에 휘말리며 처참한 패배를 맞본다. 정 대표는 2007년 1월 국민적 지지율이 바닥에 떨어진 노 대통령의 탈당 요구 대열에 정 대표계로 분류되던 강창일․채수찬 의원 등이 적극 동조하면서 정 대표 역시 암묵적 동의를 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첫날 조문을 위해 김해 봉하마을 빈소를 찾았던 정 대표는 노사모 등 추모객의 반대에 부닥쳐 발길을 되돌려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으며, 결국 정 대표는 다음 날 새벽 ‘뒷문 조문’으로 간신히 분향을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여의도를 이끌고 있는 4당 대표들이 노 전 대통령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으면서 삼국지연의의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이겼다”는 고사에 빗대어 “죽은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있는 여의도 국회를 지배한다”라는 이야기마저 등장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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