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부터 노동·빈민운동으로 교수에서 정치인까지의 삶

손학규 대표 / 손학규 대표 페이스북
손학규 대표 / 손학규 대표 페이스북

바른미래당 9.2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그에 대한 삶의 역정이 관심이 되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하여 졸업 후 노동·빈민운동가로 그리고 교수에서 정치인까지의 다양한 삶을 살아온 손 대표의 인생 6막은 성공할 수 있을까?

손 대표는 1947년 경기도 시흥(현재 서울특별시 금천구) 출생이다. 손 대표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1965년부터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고교시절부터 절친이었던 법대에 조영래, 상대에 김근태와 더불어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이름을 떨친다. 대학 졸업 후 병역의무를 마친 손 대표는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에 투신하여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에 항거하는 대표적 인물로 자리 잡는다. 손 대표는 부마항쟁 직후 수사당국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다 10.26사건이 터지면서 死地(사지)에서 극적으로 살아난다. 여기까지가 손 대표의 인생 1막이라고 볼 수 있다.

손 대표의 인생 2막은 80년 ‘서울의 봄’이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이때부터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운 故 김근태 전 의장과 인권변호사로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변호를 맡아 역시 전두환 정권에 항거한 故 조영래 변호사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987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손 대표는 귀국하여 유학기간 중 역할을 다하지 못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며, 인하대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진보적 소장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여기까지가 손 대표의 인생 2막이라고 볼 수 있다.

손 대표의 인생 3막은 국민적 인기가 상종가를 치던 대통령 YS에 의해 1993년 4.23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후보로 영입되어 경기 광명시에 출마하면서부터다. 이는 평생 손 대표를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며, 대선 본선 진출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 되고 만다. 손 대표는 민자당 윤항열 의원의 급서로 치러진 경기 광명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44.9%를 득표하며 민주당 최정택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의 영광을 안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경기 광명을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한 손 대표는 그해 11월 당시로서는 최연소 보건복지부장관에 임명되며 YS의 문민정부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손 대표는 1998년 5.11 지방선거를 앞두고 의원직 사퇴 후 민선 2대 경기도지사에 출마하나, 새정치국민회의 임창열 후보에게 패하며 고배를 마신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DJ의 측근이자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역임한 3선 중진 조세형 후보를 1.32%p 차이로 누르고 辛勝(신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한다. 손 대표는 2002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의원직 사퇴 후 민선 3대 경기도지사에 출마하여 새천년민주당 진념 후보를 22.39%p 차이로 대파하고 민선 2대 패배를 만회한다. 손 대표는 경기도지사 4년 임기 중 세계 114개 첨단기업에서 141억 달러를 유치하여 직·간접적으로 경기도내에 8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경기도의 4년 평균 경제성장률을 7.5%에 이르게 하면서 대선 후보로서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2006년 경기도지사에서 물러난 손 대표는 민심대장정을 강행하면서 대권 행보에 나섰으나,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여론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한다. 이때부터 일명 ‘손학규 징크스’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2007년 1월 ‘21세기 광개토전략’을 공개하며 지지율 반등에 나섰으나, 고건 전 국무총리의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2007년 3월 한나라당을 전격 탈당하며 마지막 반전을 꾀했으나, 한미FTA가 체결되면서 역시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일명 ‘손학규 징크스’는 굳어지고 만다. 어찌 보면 민자당부터 신한국당으로 그리고 한나라당 소속으로 있던 손 대표의 인생 3막이 자신의 생애 중 가장 화려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으나, 손 대표는 인생 3막의 시작인 YS로부터 영입을 제안받았을 당시의 고뇌했던 흔적을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표현한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 당선 직후부터 안가 철폐다, 청와대 앞길을 개방한다, 인왕산을 개방한다, 하나회 척결이다, 부패 정치인 구속이다, 토사구팽이다 등등 개혁의 열풍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였다. 뒤이어 시행된 금융실명제도 이미 예견되고 있던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90%를 넘기고 있었다. 내 마음은 설렜다. 나도 정치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꿈틀댔다. ‘개혁’이라는 명분이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망을 자극한 것이었다. 주저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가 아무리 최초의 ‘문민’정부이고, YS가 DJ와 함께 민주화의 양대 산맥이라고는 하지만, YS정부는 군사독재의 산물인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으로 태어난 민자당 정권이 아닌가? 더구나 개인적으로는 서강대 재직 당시 김대중 후보를 강의에 초청해 통일에 관한 특강을 청해 들은 일까지 있었다.

김대중 총재는 대선 패배 후 나를 동교동 자택으로 초청하여 조찬을 나누며 강의 초청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고, 나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총재에게 그동안 닦아온 뜻과 경륜을 펴지 못하게 된데 대해 아쉬움을 표해 경의를 다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빨랐다. 그동안 내가 고민하고 투쟁해 온 뜻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싶었다. 당시 운동권 선후배들이 13대, 14대 국회에 이미 진출해 있었지만, 솔직히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청춘의 날들을 오직 투쟁의 시간으로 채웠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민주주의는 왔으니 더 넓은 세계를 보겠다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왔으니 이제 그 포부를 펼쳐 보이고도 싶었다.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망이 보궐선거를 계기로, 개혁을 명분으로, 분출한 것이었다. 김대중 총재의 정계은퇴 선언이 민자당으로 가는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스스로 덜어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욕망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여, 욕망을 악의 영역으로만 분류해버린다면 세상에는 마하트마 간디 같은 성인만 존재해야 마땅하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사람들은 욕망을 가진 존재들이다. 욕망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고, 욕망의 내용과 목표가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만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당시의 내 욕망이 선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는 또 하나의 욕망이 있다. 이제는 제발 그 ‘주홍글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말이다. YS 정권 초기의 개혁 열풍 속에서 민자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대통령으로서 지난 정권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시간이 흘러 차별성은 희석되었다. 특히 YS가 힘이 빠지고 구 민정계 세력이 당의 중심이 되면서 개혁은 퇴색하고,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수구적, 권위주의적 행태가 되살아나면서, ‘개혁 위해 나섰다’는 나의 선거 구호는 빛바랜 휴지 조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도 한참 건넌 뒤였다”라고 언급했다.

손 대표의 인생 4막은 한나라당 탈당으로 시작된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 대표는 2007년 8월 민주화세력의 대통합을 이루어낸다는 명분으로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하여 대통령 국민경선에 참여했으나, 당내 기반이 공고한 정동영 후보에게 패하며 본선 진출이 좌절된다. 아이러니하게도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경선에 참여해 나란히 1위와 3위를 차지한 정동영 후보와 이해찬 후보도 최근 치러진 민주평화당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오르며 ‘어게인 2007’이 재현된 상황이다.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에 오른 손 대표는 민주당과의 통합을 주도해 민주통합당 대표에 오른다. 그해 4월 열린 18대 총선에서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게 3.67%p 차이로 석패한 후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춘천에서 칩거에 들어간다. 2년 정도의 강원도 칩거 후 2010년 10월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내 기반이 탄탄한 정동영과 정세균을 누르고 민주당 대표에 오르게 된다. 세 번째 당 대표를 맡게 된 것이다. 2011년 4.27 재·보궐선거에서 ‘천당 밑에 분당’으로 일컬어지던 보수진영의 아성인 경기 성남분당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대표 출신이자 5선 중진인 강재섭 후보를 2.7%p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면서 이 지역 최초의 진보진영 승리를 안겨주며 정권탈환의 선봉에 선다. 손 대표는 2011년 11월 시민통합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의 통합을 주도하여 민주통합당을 출범시키며 상임고문 직책으로 18대 대선 출마를 준비하나, 이미 당은 친노 핵심인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대표, 역시 친노 핵심인 문성근 최고위원 등이 당을 장악한 상태였다. 2012년 6월 18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손 대표는 친노 진영의 지원시격을 받은 故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며 두 번째로 본선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경선에서 패한 손 대표는 백의종군했으나, 문재인 후보는 그해 12월 18일 치러진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하고 만다. 이 때 케스팅보트를 쥔 중도개혁세력들은 “손학규가 민주통합당 후보였더라면, 박근혜를 꺾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되뇌었다. 2014년 민선 6대 지방선거에서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선거 승리를 이끈 손 대표는 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7.30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경기 수원병에 출마했으나, 신예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게 7.8%p 차이로 패한 다음 날 “정치에서는 들고 날 때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평소 생각이라”며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저의 생활 철학이다. 지금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남기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한나라당 탈당 후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하여 세 차례의 당 대표를 지내고, 두 차례의 대선에서 불쏘시개 역할을 한 이 기간이 손 대표의 인생 4막으로 볼 수 있다.

손 대표의 인생 5막은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전남 강진의 만덕산 자락에 위치한 한 토굴에서 칩거하며 숨고르기에 들어간 시기부터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압승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되던 2016년 20대 총선 당시 손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측으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 만덕산에 칩거하게 된다. 20대 총선 결과가 예상외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참패하고, 진보진영이 승리를 거두자 손 대표는 그해 10월 강진 만덕산 토굴 생활을 정리하고 ‘제7공화국으로의 개헌’을 주창하며 정계 복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18대와 19대 대선 경선에서 두 차례나 패하며 불쏘시개 역할만 톡톡히 하고 본선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손 대표는 측근인 이찬열(3선, 경기 수원갑) 의원과 민주당을 전격 탈당하며, 국민주권개혁회의를 창립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며 19대 대선을 준비한다. 2017년 2월 17일 손 대표는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국민주권개혁회의와의 통합을 선언했으나, 통합선언 당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에 의해 구속 수감되면서 일명 ‘손학규 징크스’는 여지없이 등장하고 만다. 손 대표는 2017년 3월 19일 광화문에서 국민의당 후보로의 세 번째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경선에서 안철수 후보에게 56.94%p 차이로 처참하게 패하며 역시 본선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손 대표는 경선 패배 후 백의종군하며 안철수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약했으나, 안철수 후보가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물론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에게도 패하며 3위에 머물고, 설상가상으로 문준용 씨 제보 조작 사건으로 당은 공중분해 될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해 9월 미국으로 3개월간의 연수를 떠난 손 대표는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승부수로 내걸 즈음 귀국하여 통합 찬성파와 반대파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다. 이후 바른정당과의 통합 찬성파에 손을 들어준 손 대표는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 직책을 맡았으나,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고공지지율로 인해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하며 당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된다. 또한 6.13 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서울 송파병 재선거 출마 여부를 놓고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여론의 질타를 받기까지 이른다. 여기까지가 손 대표의 인생 5막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손 대표는 바른미래당의 당 대표로서 인생 6막을 시작하려고 한다. 경기고 출신 ‘서울대 운동권 3인방’이던 조영래 변호사도 김근태 의장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지난 2011년 11월 30일 김근태 전 의장이 별세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훔치던 손 대표의 모습이 떠오른다. 손 대표는 인생 6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먼 훗날 조 변호사와 김 전 의장을 만나면 잠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을 미안해하며 사과할 날만을 기다릴 것이다. 손 대표는 당 대표에 출마하면서 “정치인생을 걸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 패기와 열정을 보이려 한다”고 밝혔다. 당 대표 출마 슬로건처럼 “이기는 정당! 다같이 갑시다!”를 힘차게 외치며 바른미래당의 올바른 가치를 지켜내면서 보수와 진보를 극복한 중도개혁세력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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