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나목의 길라잡이 수필
[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나목의 길라잡이 수필
  • 김래호 작가
  • 승인 2018.08.24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보기로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 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 피천득(1910-2007) 수필 ‘만년’의 마지막 문단

어느덧 첼로 그 음색과 잘 어울리는 가을이다. 비올라가 따뜻하고 정겨운 봄의 파동이라면, 바이얼린은 만물이 성장을 구가하는 화려하고 당당한 여름 닮은 음질이다. 콘트라베이스 선율은 대지를 잠재우는 겨울의 장중함 그대로다. 여기에 첼로는 정갈하고 침착한 가을 햇살처럼 퍼지는 음파를 낸다.

첼로의 음유 시인인 미샤 마이스키가 연주하는 막스 부르흐의 ‘콜 니드라이 작품 47’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첼로를 위한 로망스’를 들으면 가을이 어렴풋이 보인다.

클로드 모네는 햇빛에 극명하게 반응하는 존재를 상징하는 ‘수련’ 연작을 남겼다. 폴 세잔은 그를 가리켜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고 평했다. 이는 만물이 일광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끈질기게 그려나간 모네의 예술혼에 대한 헌사였다.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었지만 그는 온종일 태양의 관찰에 따른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정오 무렵에만 피는 여름 꽃 ‘수련’이 지면, 바실리 칸딘스키의 ‘컴포지션’ 연작 빼닮은 단풍이 곱게 물 드는 가을이다. 만산홍엽- 그는 당시 러시아의 성공한 법학자였는데 모네의 모스코바 순회전을 보고 감명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연못의 수련- 그 전통적인 풍경을 선과 색채로 환원하며 미술사의 혁명을 일으킨 칸딘스키- 그는 규칙적인 기하학적 형태와 선을 통해 현실적 대상의 부재를 그려 냈는데 바로 ‘신의 가을’을 체현한 것이다.

“말은 마음의 소리요, 문자는 마음의 그림이다. 소리와 그림이 형상되면 군자와 소인이 분명해진다.” 중국 서한의 관리이자 철학자인 양웅(B.C 53- AD 18)의 정언인데 진정 웅숭깊다. 마음이 품은 뜻을 드러내는 그림과 말. 그래서 ‘시는 소리 있는 그림有聲之畵’, 그림은 소리 없는 시無聲之詩‘로 결국 하나의 마음이 내는 여러 갈래이다. 동진의 고개지는 “손으로 오현을 타는 것을 그리기는 쉬지만, 돌아가는 기러기를 눈으로 보내는 것은 그리기 어렵다.”고 했다. 철 좇아 기러기 떠나가듯 사랑하는 것들과의 몌별을 어떻게 화폭에 담고, 시로 지을 것인가?

사람들 사는 경내에 오두막집을 엮었으나 /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다 / 그대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묻는다면 / 마음이 초원해지니 땅은 저절로 외떨어진다네 /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 수연히 먼 남산을 보게 되었네 / 산 기운은 저물녘이 되어 아름다운데 / 나는 새 짝을 이루어 돌아간다 / 이 가운데 진실한 뜻이 있으나 / 말하려니 어느새 말을 잊었노라 – 도연명(365-427) 한시 ‘음주: 술을 마시고’ 제5수 전문

이 시 한 편에 기실 수 천 만 장의 그림이 그려졌으니 바로 ‘채국동리도’이다. 원량은 41세 되던 405년에 귀향한 뒤 농사를 지으면서, 무위자연의 경지에서 천방 하늘이 베푼 자유를 누리며 여생을 보냈다. 어느 가을날 동쪽 울타리에 핀 국화를 꺾다가 허리를 펴고 남산을 바라보니, 핏빛 저녁노을이 장한데 한 쌍의 새가 둥지로 돌아간다. 불현듯 벅차오르는 가슴 속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 말문이 막힌다. 새와 남산, 국화와 내가 이미 하나인데 굳이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저 말 없는 자연처럼 시인 역시 한 자락 깨쳤으니 입을 닫았으리라. 망언忘言은 이런 것이다.

과연 후대의 숱한 ‘채국동리도’에서 도연명의 경지가 오롯이 전달되었는가? 비록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만 마음이 초원하니 장소마저 벗어난 초월 그 뜻 말이다. 외물과 내물이 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몰아일체의 경지이니 곧 사벌등안, 득어망전 그 망언의 진수이다.

하루는 작은 일생- 쇼펜하우어의 이 아포리즘에 기대면 오후가 ‘오십 이후의 나이’라고 단정해도 그리 부당하지는 않다. 더욱이 ‘호모 헌드레드’ 시대이고 보면 쉰 살부터 중년이라고 부르는 게 지극히 온당하다. 그렇다면 나날이 쌓이는 1년에 4계절이 순환하듯 사람 한 살이에서 중년은 가을을 의미한다. 오래 전부터 나는 ‘춘하추동’이라고 쓰고, ‘볼열갈결’로 풀어왔다. 볼 만한 봄이고, 열리는 여름이자, 갈 차비하는 가을이고, 나이테로 묶이는 결의 겨울인 것이다. 여러 해 살이 나무나 사람은 동체이명의 존재이다.

나는 해마다 가을철이 시작되면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몽테뉴의 ”에세“,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피천득의 ”수필“,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을 펼쳐든다. 피천득선생이 석명하신 ’수필‘의 정의에 꼭 부합하는 고전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설흔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 피천득 ‘수필’ 부분

이녁이여 짜장 36살이 넘었는가? 그러면 그저, 단순하게, 산책하듯 수필들 써 보십시다. 한뉘의 중반을 넘기면서 사랑한 것들과 또 사랑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오롯이 드러날 터. 서툰 봄과 여름 여행은 끝났지만 한평생의 가을과 겨울의 그것은 계속된다. 이 길목에서 에세를 쓰는 일은 자기 서사를 통해 방치했던 마음의 무성한 잡풀을 제거하는 행위다. 반복되었던 과거 일상의 무질서는 글을 통해 질서정연한 일습을 갖춘다.

수필 몇 편 쓰고, 고치다 보면 피천득선생처럼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고백할 용기도 생겨날 것이다. 봄에 움 틔우고, 여름철 내내 부여잡았던 욕망의 잎들- 나무는 늦가을이면 죄다 낙엽으로 떨구고, 벌거벗은 채 겨울 날 채비를 한다. 수필은 나목으로 가는 중년의 길라잡이다.

 


추천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