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벗 사귀기를 장자와 혜시처럼
[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벗 사귀기를 장자와 혜시처럼
  • 김래호 작가
  • 승인 2018.08.1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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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혜자가 죽은 뒤로 장석의 상대가 사라지듯 이제 더불어 말할 사람이 없어졌구나! - “장자” 잡편 ‘서무귀’

부모님 돌아가시면 산에, 자식을 앞세우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양친상이 천붕이요, 참척 그 가슴이 터지는 고통이 자손을 먼저 잃는 일이다. 피붙이 그 천륜이 끊어지는데 어찌 애석하고 비통하지 않겠는가? 인륜지대사라는 혼례를 올린 부부의 별리도 이에 못지않은 슬픔이다. 웃으며 맞고, 울며 보내는 출생과 죽음을 지켜보는 살붙이들이 바로 가족이자 식구다.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편이고, 영원한 내 편이다.

한뉘는 이런 혈연적인 ‘편’을 벗어나 ‘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지연과 학연, 직장의 동료 인연 맺으며 꾸려가는 사회생활. 그러면서 한 사람에 대한 ‘평’이 쌓이는데 여기에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따른다. 하루 24시간, 4계절 12달 1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지만 저마다 처한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변화무쌍한 여러 판에서 춤추는 게 사람의 한평생이리라.

도반- 불교용어로 함께 수행하며 불법을 공부하는 벗이라는 뜻이다. 한자 뜻대로 새기면 길 도道, 짝 반伴 곧 ‘길 위의 친구’이다. 멀고 험한 인생길에서 동반자로 장단 맞춰 춤추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이. 이런 관계를 금란지교나 송무백열, 백아절현 이라고 부른다. 쇠처럼 굳고 난처럼 향기로운 우정은 소나무가 잘 자라 무성한 것을 보고 측백나무가 기뻐하듯, 자신의 연주를 높이 샀던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타기를 그만두었던 백아 같은 심정에 젖어 들게 한다.

장자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혜시라는 정치가였다. 혜자는 장주와 비슷한 연배로 같은 송나라 출신인데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반면에 장자는 초나라 위왕의 재상 제의도 거절하고 인간사회의 속박을 벗어나, 절대 자유 정신의 경지 그 자연에서 산책하듯 살았다. “내 차라리 더러운 진흙탕에서 노닐며 스스로 유쾌하게 지낼지언정 나라 다스리는 사람에게 얽매이지는 않겠소. 죽는 날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을 편안케 지켜나가겠소.” 이렇듯 장자와 혜시는 정치관은 달랐지만 도道 철학의 친구로 자주 만나고, 담론을 나누며 자신의 논리를 공고히 했다.

혜시의 학설은 다방면에 걸쳐 있고, 그 저서는 다섯 대의 수레에 쌓을 정도이지만 그가 말하는 도는 이것저것 뒤섞여서 정리되지 않고, 그가 말하는 내용은 사물의 도리에 맞지 않다. - “장자” 잡편 ‘천하’

현재 ‘다섯 대의 수레에 쌓을 정도’라던 그 책들은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혜시의 ‘역물십사’를 비롯한 변설들을 집중 소개한 ‘천하’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장자는 혜시의 변설을 이렇게 평했다. “그의 행위는 메아리를 찾으려고 소리를 지르고, 형체와 그림자가 경주함과 같아서 언제 끝날지 모른다.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장자‘의 마지막 문단은 제자백가 당시 명가(名家)들의 주창한 바를 적확하게 비유하고 있다. ”산에는 입이 있고,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단언한 명가. 도가의 장자와 명가의 장자- 두 지인은 서로 소리와 메아리, 그림자와 형체처럼 다른 몸이지만 한 마음의 이체동심이었다.

혜시와 공손룡을 비롯한 궤변학파는 인식의 상대성과 제한성을 강조하여 상식과 경험에 기초한 고정 관념과 편견을 극복하려고 했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 명실상부의 관계를 바로잡아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실천적인 정치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명가는 고대 그리스 ‘제논의 역설’과 흡사하다. ‘화살의 역설’을 명가에서는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규정했으며, 명가의 “한 자 길이의 채찍도 매일 반씩 잘라 버린다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분법의 역설’과 판박이인 것이다. 동서양에서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철학적 방법론을 최초로 제기하고 발달시킨 명가와 소피스트.

내친김에 장자와 혜시의 논리를 살펴보자. 혜자는 “닭에는 세 개의 다리가 있다.”고 정언했는데 장자 역시 삼생만물三生萬物의 명제를 내세웠다. “대상으로서의 1과, 그것을 표현한 말로써 2가 되고, 그 2와 분리되기 전의 1이 합쳐서 3이 된다.”(내편 ‘제물론’)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어려운 명제가 아니다. 어린아이가 낱말을 배우고, 글을 읽히는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닭의 다리는 분명 2개이지만 머릿속에 ‘닭 다리’가 있어야 비로소 계족이 되지 않는가 말이다.

아무튼 “장자”에는 장주와 혜자가 학문적으로 살천스럽게 대거리하는 대목이 스무 차례 남짓 등장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장자의 부인상에 혜시가 문상 간 때이다. 장자가 두 다리를 뻗고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못한 혜자가 한마디 한다. 아내와 함께 살고 자식을 키우며 늙었는데 곡도 않고 노래를 부르다니 정말 무정한 위인이구려! 무슨 소리요! 지금 처는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만 한다면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을 그쳤단 말이오.(외편 ‘지락’) 이렇듯 두 현자는 어떤 상황을 놓고도 대립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확인하고 심화시켜 나간 것이다. 장자와 혜시 모두 생몰 연대가 불분명하지만 “장자”의 기록으로는 혜자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훗날 장자가 혜시의 묘 앞을 지나다가 멈추고 일행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코에 흰 흙을 파리 날개 두께 만큼 바르고 도끼로 깎아내게 했더이다. 그러자 장석이라는 장인은 서슴지 않고 도끼를 들어 바람 소리 나게 휘두르며 백토를 다 깎았는데 그 사람은 꿈쩍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 있었소. 이 이야기를 들은 송의 원군이 시험 삼아 내게도 해 보이길 간청했다 합니다. 그러자 장석은 지금은 그 근원이 되는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고 합니다. 장석의 그런 기술을 믿고 알아주는 위인이 죽은 것처럼, 내 친구 혜시도 저렇게 묻혔으니 내가 누구와 현담을 나눈단 말이요... 교학상장. 서로 가르치면서 배우는 스승과 제자 같았던 장자와 혜시의 진정한 우정이 진솔하게 묻어난다.

입추도 지나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풀벌레 소리를 타고 오는 가을이 무척 반가운 것은 이번 여름의 무더위 때문이다. 가마솥과 찜통, 불볕의 염천 삼복과 잠 못 이루는 나날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다. 하지만 어김없이 순환하는 우주의 풀무질은 찬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한철 끊겼던 친구들을 찾아 나서기 더없이 좋은 가을철- 여여 무탈한지, 공부는 얼마나 진척이 있는지 두루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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