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깔려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최순우(1916-1984) ‘부석사 무량수전’

작은 일생-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정언에 기대면 여행도 작은 일생이다. 여성의 자궁에서 태어나 대지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인간은 그 누구나 여행객이다. 이 ‘자궁’을 기독교에서는 본향이라 이르고, 불토에서는 극락이라고 칭한다. 여기에 이상적인 현세를 도교는 건덕, 유교에서는 대동사회라고 상정했다. 신앙과 신학- 어느 편을 추종하든지 사람이면 지금, 여기보다 아름다운 거기, 그곳을 찾는 법. 그러면서 회두리에 열자 식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맞는다. 우리는 큰 여행의 종착지 그 ‘집’을 향해 가면서 종종 작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건덕 그 나라의 백성은 우매하고 소박하며 사심이나 욕망이 적고, 경작할 줄은 알면서도 저장함을 모르며, 남에게 베풀어 주어도 그 보답을 바라지 않고, 무엇이 옳은 길에 알맞은지 모르며 무엇이 예의대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무심하게 거동하여 자취를 남기지 않고 곧 자연의 큰 길 곧 대도로 나아가게 됩니다. 살아서는 마음껏 즐기고, 죽으면 편히 묻히고 맙니다. - “장자” ‘산목편’

이 말을 들은 노나라 왕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장 가고 싶소. 그러나 건덕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한데 나에게는 수레와 배가 없소?” 시남의 의료가 아뢴다. “높은 지위를 믿는 오만함과 욕망을 버린 빈 수레를 타십시오!” 장강에 이르러 신하들이 물러가고, 배에 오르시면 허무의 경지를 느끼십시오. 빈 배가 와 부딪혀도 욕설을 하지 않지만, 사람이 탄 배를 향해 피하고, 물러나라 외치다 끝내 욕을 하는 인간의 본성을 떨쳐야 비로소 그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스스로 텅 비게 산다면 그 무엇이 그에게 해를 끼치겠습니까?

몸과 마음을 부리며 사는 사람 한살이-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외물’과 부닥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깜냥 대응해가며 산다. 손쉬운 상대는 업신여기고 살천스럽게 대하지만 강한 축들에게는 비굴하고 얍삽하게 군다. 울뚝하지만 참고 살갑게 굴며때로는 치밀한 계략의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이런 인지상정의 ‘판’이 반복되는 일상과 직장생활에서 여행은 그런 혼란을 벗어나 마음 맞는 내 ‘편’과 평온을 되찾는 행위이다.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닌 잠시 말이다. 물론 평상심을 잃지 않고 오직 ‘내물’ 자신의 마음을 좇는 한뉘를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소위 무소유를 실천하는 유형인데 조금 덜 갖기를 바란다 하지만 기실 다 가졌다 여겨 소유를 포기하는 인간은 드믈다. 그렇지만 세상은, 사회는 그런 부류에 대해 이런 ‘평’을 한다. 사람은 참 좋은데...

7월 말 이제 방학과 휴가철이다. 유명 피서지나 관광지가 인산인해를 이루는 시기. 먹고 사느라 바빴던 나날의 ‘여기’를 떠나,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갖는 ‘거기’를 찾아나서는 큰 일생이라는 여행 중의 또 작은 여행. 여기에서 헝가리 문예비평가 루카치에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친숙하며 모험에 찬 것이지만 뜻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었다. 세계는 넓지만 마치 자기 집과 같은데 영혼 속에 타오르고 있는 불이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본질적 특성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 “소설의 이론”

문제적 개인- 우리는 ‘신화의 시대’ 그 낙원에서 추방돼 ‘별빛과 불’이 다른 것인 양 살게 되었다. 역사는 진보 발전하고, 사람들은 더욱 행복해졌다 여기지만 돌아갈 곳을 잃고 헤매는 현실, 사르트르 표현대로 ‘던져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장자”에 등장하는 1천 6백여 년 전 인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나라와 백성이 모두 자기 소유였던 노나라 왕까지 지금, 여기를 당장 떠나겠다고 서둘렀겠는가? 고해라 말하거늘 산다는 것은 그만큼 각박하고, 비속하고, 너절하고, 던적스런 것. 그렇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찾아야 그나마 위안과 위무를 얻을 수 있는가?

혜곡 최순우선생은 경북 영주의 부석사 경내에 서자마자 사무치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고마움에 사로잡혔다.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 보인 것이다. 대자연 속에 그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평온과 화평을 느끼는 터전을 물려준 선조들에게 무한히 감사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미를 이렇게 규정했다. “다채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그다지 슬플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덤덤한 매무새가 한국미술의 마음씨다.”

자녀들 손잡고 나서는 휴가철의 여행- 부디 평소 마음속에 그리던 풍경 만나길 소망한다. 일상의 쳇바퀴 돌며 그리고, 또 그린 ‘그림’ 같은 그곳에 서리라, 이번 여름에는. 늘 오래 바라고, 또 바라 마침내 바람이 되어 떠난 거기에서 보리라, 가없이 바람에 실려 보내던 그 마음씨 아름답게 피어난 풍광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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