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호 변호사 (前법무연수원장, 前대전지·고검장) / 뉴스티앤티

제 생애 넘지 못한 벽 중 하나가 영어 회화입니다. 그깟 말 하나 배우는데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영어회화입니다.

중학교 1학년 영어 수업이 한 달쯤 지났을 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영어 교과서를 읽게 하셨습니다. 유독 한 학생의 발음이 버터를 바른 듯 잘 굴러갔습니다. 선생님이 영어를 미리 배웠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의 답은 이러했습니다. "워싱턴에서 태어나 6살까지 살았습니다." 저에게 영어는 미국에서 태어나야 잘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기며 영어에 대한 일종의 한계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외우며 공부하는 것은 곧 잘하여 중학교 내내 성적은 좋았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입학 전 봄방학 때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잘 해보려고 당시 최고의 인기 강사이던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 선생님의 강의를 두 달 들었습니다. 한 달은 <성문종합영어>의 짝수 문제를, 한 달은 홀수 문제를 푸는 식이었습니다. <성문종합영어>의 세계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반짝인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니다.

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Look at the bright side.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이런 영어 명구를 배운 것도 다 <성문종합영어> 덕분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 보니 중학교 동창인 최인환은 <성문기본영어>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우쭐해졌습니다. '나는 <성문 종합영어>를 다 떼고 왔는데 이제 <성문기본영어>라니' 그후 영어 시간이 시시해졌고 영어수업과 저의 영어는 따로 놀기 시작하였습니다. 선행학습이 가져온 폐해였습니다. <성문종합영어>를 공부한 저는 영어 젬뱅이고, <성문기본영어>를 공부하던 그 친구는 지금 영문과 교수입니다.

그때 페이스를 잃은 영어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마칠 때까지도 영어는 제 생애 큰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검사가 되고 나니 다들 해외연수를 가기 위해 언어를 선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 영어를 선택하는 관계로 미국 유학은 치열하였습니다. 저도 미국에 갈 생각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무렵 검찰에서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류모 선배 검사와 같은 아파트에 살아 아침마다 그 선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근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배님처럼 영어를 잘할 수 있나요.' '나는 고등학교 때 미국 선교사 마을에 살아 그분들과 같이 생활해서 영어를 잘하게 된 거야. 지금 나처럼 영어 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야.'

이 한마디에 저는 영어를 포기하고 일본어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다시 일본어는 스페인어로 바뀌었고 결국 1992년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도 '영어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만큼 영어는 저에게 평생 해결되지 않고 따라다니는 골칫덩이였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영어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김대중 대통령께서 쓰신 옥중서신의 한 대목이 생각났습니다. 나이 사십에 옥중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해서 영어회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영어회화 정복기는 그저 그분들의 이야기일 뿐 저에게 적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검찰에서 생활하면서 늘 영어회화 선생님을 일주일에 한 번은 불러 영어공부를 하였습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동료 검사들과 같이. 그러나 영어는 늘 그 모양이었습니다. 대구지검 차장검사 시절에는 부장 몇 사람을 설득하여 같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중에는 1년을 미국에 유학 다녀온 사람도 있었는데 영어회화를 같이 못 하기는 마찬가지라 그것을 위안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검사장, 고검장을 하면서도 늘 영어를 스트레스로 가지고 살았습니다. 왜 이렇게 영어의 끈을 놓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을 둘 다 미국 유학 보낸 것은 이런 영어에 대한 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이들 때문에라도 영어를 공부하여야 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아이들 학교에 가서 영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제법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내 뒤나 아이들 뒤에 숨어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아시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영어에 대한 답답함은 회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글에서 영어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된 다음부터는 쏟아지는 영어문서를 독해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나 사전을 찾아가며 영어 공부하듯 영어문서를 읽는 것은 속도나 이해도 면에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법연수원 부원장 시절에는 시간이 좀 있어 영국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지를 일 삼아 독해한 적도 있었지만 그 속도는 너무나도 느려 한 반 년 하다가 그만두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 8월 검찰을 퇴직하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처음 3년은 업무가 너무 바빠 영어에 눈 돌릴 틈이 없다가 약 2년 전부터 다시 영어회화 선생님을 일주일에 한 번 모셔 영어회화를 하기 시작하였고 일주일에 한 번 변호사들과 같이 영자신문을 강독하는 모임도 가지는 등 영어의 끈을 다시 움켜쥐었습니다. 영어공부라고 하지만 단어 하나 안 찾고 문장 하나 안 외우는 공부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공부라기보다는 영어와의 만남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어느 날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던 것이니 그만두기 무엇하여 계속하였습니다. 영자신문 강독 시간은 그냥 듣고 있으면 되니까 졸지 않으면 되는데 문제는 영어회화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영어회화 공부를 하여야 하니 무엇인가 떠들어야 하였습니다. 한 6개월 쯤 지났을 때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이 나이에 영어회화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영어로 매주 한 시간 수다나 떨자. 영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상관하지 말고 그저 영어로 한 시간 이야기만 해보자. 절대로 단어 찾지 말고 단어 외우지 말고 예습이나 복습하지 말고 그저 친구와 수다 떨듯 영어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한 시간을 보내자.' 이렇게 영어 수다를 떤 지 1년 반이 되었습니다.

저와 영어 선생님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다양합니다. 경영, 인공지능, 북핵, 탄핵 등 제가 사회생활에서 나누는 대화를 영어로 바꾼 것뿐입니다. 그 짧은 영어로 어떻게 이런 대화가 되는지 저도 놀랍지만 틀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저를 편하게 해주었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그 사이에 외국 여행도 다녔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을 만나면 사정은 180도 달라져 입이 달라붙었습니다. 이불안에서만 활갯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쯤 한림대에서 디지털 포렌식을 가르치고 있는 영국인 조슈아 교수가 업무 협의차 회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공식행사를 마치고 환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로 통역이 없고 저희 직원이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직원도 통역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몇 분 흘렀습니다. 답답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래 앞에 앉아 있는 분이 조슈아 교수가 아니라 영어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자. 틀리면 어떤가. 다 우리 식구들인데.' 가벼운 주제부터 시작하다가 인공지능과 디지털 포렌식, 딥러닝과 감사시스템 등 평소 제가 기술적으로 품고 있던 궁금증을 영국인 디지털 포렌식 전공 교수와 영어로 대화 아니 토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영어가 되는지 아닌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제가 궁금한 것을 묻고 답을 듣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다들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제 영어 구사 능력에 놀란 것이 아니라 저의 과감성에 놀란 모습들이었습니다. 저도 저 자신에 놀랐습니다. 저의 영어를 붙잡고 있던 심리적 장벽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그 후 얼마 전 이탈리아를 갔을 때 혼자 여러 상점을 들렀습니다. 영어로 소통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습니다. 어느 그릇 가게에 들어가서는 마치 한국에 그 그릇을 수입할 것처럼 30분간 사장과 대화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2년간 영어로 수다를 떤 것이 바꾼 것이 무엇일까요. 저의 영어 회화 실력을 높인 것이 아니라 영어 회화에 대한 저의 심리적 장벽을 녹아내린 것이었습니다.

1971년 중학교 1학년 때 영어를 만난 이래 45년 만에 영어가 공부의 대상이 아니나 의사소통의 수단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도 영어 수다는 계속 될것입니다. 수다가 곧 의사소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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