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원 박사 / 뉴스티앤티
서준원 박사 / 뉴스티앤티

충청 출신의 큰 정치인 김종필 전 총리가 고향 부여로 돌아갔다. 고인은 별칭 JP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에 정치적 변혁을 일궈낸 진보적 인물이다. 이후 정치권에 몸담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성쇠를 함께 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양 김(김영삼-김대중)과 영욕을 함께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운정(雲庭)은 JP의 아호다. 생전에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운정재단에서 계간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계간지 ‘운정’은 주로 JP의 지난 시절의 활동을 담아내는 아키브(Archive)나 다름없기에, 수많은 인연들의 기억과 추억이 소개되고 있다. 스쳐 간 인물들의 JP에 대한 존경과 직접경험이 쏟아지면서 세간에 알려지지 않는 미담과 덕담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계간지 ‘운정’은 역사기록이자 인물사 연구에 보탬이 되는 귀중한 자료집이다.

이미 고인이 된 JP를 둘러싸고 말도 많고 논쟁도 이어진다. 역사와 인물에 대한 인식의 간극 만큼이나 JP에 대한 시각과 판단도 엇갈린다. 이미 고인이 된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영웅화와 성역화에 열을 올리는 특정 부류의 소치라 치부하기엔 너무 안타깝다.

인간의 삶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공과(功過)가 수반된다. 성인도 공과가 있는 법이다. 특히 속세 권력에 물든 인물들은 생전에 접했던 일로 공과가 교차한다. 진보세력은 공과 과를 함께 짚어보려는 시도조차 거부한다. 진보정권 하에선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를 전제로 온통 비난만 할 뿐 공마저 격하하기에 급급하다. 건국과 근대화의 공은 사라지고 온통 과만 따지고 든다. 지난날의 지도자급 인사들에 대한 공과의 형평성이 아쉽다.

음식 맛을 좀 안다는 어느 맛 전문가의 비아냥이 참 어처구니없다. 정치와 권력의 맛까지 감정을 하려는 것인지, 대중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관심 끌기에 나선 모양이다. JP의 죽음에 애도하지 마라! 맛 전문가의 이런 일갈은 지나친 모욕이다. 단맛, 짠맛, 쓴맛...이런 다양한 맛 중에서 단맛만 맛이라고 우기는 격이다. 자기 입맛만 챙길 줄 알지, 남의 입맛은 관심 밖인 모양이다.

상대에 대한 비난과 모욕을 주는 짓거리마저 자유라고 치부한 모양인데, 참 한심스럽다. 누구에게도 ‘애도하지 말라’는 권고적 경고는 파렴치에 해당하는 참 못된 짓이다. 당사자는 자유 운운하지만, 애도하라! 애도 하지 말라! 할 수준까지 권리가 허용된다고 착각에 빠진 것 같다. 그건 자유의 범주를 벗어난 개인에 대한 모욕이자 무책임한 비방일 뿐이다.

20세기 초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대치국면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맑스주의자 룩셈부르크의 자유에 대한 인식, “진정한 자유는 나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다. 그의 자유에 대한 설파가 떠오른다.

고인에 대한 비방과 비난마저 감수하겠지만, 자유를 거론하면서 과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 맛 전문가의 자유 인식에 한숨만 나온다. 자칭 진보적 성향의 인사라는 부류는 늘 이랬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늘 한풀이 대상으로 일삼는다. 고인의 과를 팩트에 근거하여 비판한다면 모를까, 최소한의 예의와 범절의 잣대마저 내팽개치는 참 못된 짓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지도자급 인사에 대한 평가가 참 인색했다. 사람인지라 인물에 대한 선호가 있겠지만, 무조건 폄하하려는 경향은 보수와 진보세력 모두가 엇비슷하다. 이런 식의 역사 평가와 억지전개는 나라와 국민에게도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 오로지 권력을 잡고 승자독식의 쾌감과 희열을 바라는 것과 다름없다. 공과를 짚어주면서 상대에 대한 관용과 용서가 내포되어야 진정한 평화가 이뤄진다. 지독한 한풀이와 혐오 및 증오심만으로는 역사가 발전되기 어렵다.

JP의 어록 중에서 한 토막. “정치는 허업이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도 결국은 국민이 과실을 챙기고 정치인 스스로에겐 손에 남는 게 없다는 의미다. 속뜻은, 정치인의 희생과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시대적 책무와 희생적 헌신을 정치의 덕목으로 내세운 것이다. 물질적 풍요로움과 사익을 추구하는 그릇된 정치인에 대한 경고성 의미전달이다. 다수를 위해 일하는 자들은 정치가 어차피 허업임을 알아야 한다는 경험론적 지적이다.

생전의 JP는 돈 관리가 허술했고 물욕이 저조했다. 누구처럼(?) 꼼꼼하게 따지지 않았고, 가진 것을 오히려 스스럼없이 내놓았다. 그런 무욕 탓에 대통령을 지낸 인사들의 자식과 형제가 보여준 그런 눈꼴 사납고 불경스러운 일은 없었다. 배신과 음모 협잡과 회유 등 온갖 작태가 난무하는 삭막하고 척박한 정치권에서 문예로 눈길을 돌려 그런 허허함을 채운 인물이다. 시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까지 폭넓게 섭렵했다. 혹자는 JP를 로맨티스트로 치부하거나 타고난 재능꾼으로 여기지만 정치로 인해 발생하는 허허함을 채워 나가는 혜안을 가졌던 인물이다.

우리에겐 아직도 정치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물연구가 취약하다. 외교관과 여타 정부요인들의 인물연구도 턱없이 부족하다. 공동체와 다수를 위해 일했던 인사들에 대한 인물 연구는 나라의 미래를 위한 귀중한 보탬이 된다.

정치는 허업이다. 그러나 허업일지라도 누군가는 간단없이 이어가야 한다. 삶은 유한하고 권력도 유한하다. 삶이 그렇듯 권력과 부귀영화도 지나고 나면, 다 덧 없다. 권력을 쟁취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이마저도 한시적인 현상이다. 청와대는 국민의 집이다. 국민이 4년 만기로 빌려준 전셋집이다. 그런 전셋집에서 살았던 인사들이 하나같이 불행해진다. 어찌보면 권력마저 허업이다. JP의 퇴장은 애석하지만, 이 마저도 삶과 허업의 일환이다. 질곡의 삶을 마감하고 되돌아간 고향에서 영원한 평안을 누리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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