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그대는 아는가 /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 오세영(1942- ) 시 ‘열매’ 마지막 연

울고불고, 환호작약, 사네 못 사네 해도 세월은 가고 오는 법. 새해맞이 한다고 산과 바다로 들꾄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6월 중순이다. 여름 철새 뻐꾸기 울음 따라 봄꽃 죄다 지고, 이제 달개비나 인동초 같은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조금 있으면 배롱나무 핏방울처럼 송골송골 피어날 것이고, 염화미소 연꽃들 소류지 환히 밝힐 것이다.

이즈음이면 매실과 앵두 따위의 수확이 한창이다. 잎보다 꽃이 먼저인 봄 꽃잎들 시부적 스러진 자리의 열매.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면 새콤달콤한 맛이 오감을 일깨운다. 겨우내 삭풍과 눈보라를 이겨낸 기쁨이 이런 맛이런가? 작지만 실한 그 열매에는 겨울철 인고의 나날이 배어 있다.

산자수명- 내 고향은 소백산맥의 중산간 충북 영동이다. 영남과 호남, 충청이 맞닿은 삼도봉의 민주지산 자락, 금강의 상류 지역이다. 진달래 산빛 곱고 실개천 물 맑은 땅. 1905년 개통한 441.7km 경부철도 꼭 한가운데의 산간. 번잡한 대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한 지 어느덧 햇수로 5년이다. 이태의 농막을 벗어나 2016년 봄 본채를 짓자마자 나무부터 심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제황상유인첩”에서 일러준 바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황상(1788-1863)은 15살이던 해 정약용을 만났다. 당시 천주학쟁이로 몰린 다산이 강진에 귀양 와 있었는데 훌륭한 선생님이 아전의 아이를 몇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훌륭한 문사가 되었고, 훗날 추사 김정희가 일부러 찾아갔을 정도로 문명을 떨쳤다. 어느 날 스승께 황상이 여쭌다. “숨어 사는 은자의 거처는 어떠해야 하는지요?”

띳집 서너 칸을 나침반이 정남향을 가리키도록 해서 짓는다. 순창에서 나는 설화지로 벽을 바르고, 문설주 위에는 엷은 먹으로 옆으로 길게 뻗은 산수화를 그리도록 해라. 방안에는 서가 두 개를 설치하고, 천삼사백 권의 책을 꽂도록 한다. 담장 안에는 석류와 치자, 목련 등 갖가지 화분을 각기 품격을 갖추어 놓아둔다. 국화는 가장 많이 갖추어 48종 정도로 하고, 마당에는 사방 수십 걸음 정도 파 연꽃을 심고, 붕어를 기른다.

황상은 말년에 강진 대구면의 천개산 자락 백적동에 다산의 지침 대로 일속산방을 지었다. 그러나 스승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니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실제로 다산이 일러준 초목를 심었는지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150여 년 전의 일이니 지금쯤이면 거목이 되었으리라. 황상은 그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사계절의 흐름을 살피고, 열매들 거두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았으니 스승의 ‘설계도’를 완성한 셈이다.

다산이 말한 ‘복지’가 나에게는 고향땅이다. 땅에서 나는 물산이 경제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먼 내 조상들. 선조들은 24절기 좇아 농사짓느라 잠식도 터전을 떠날 수 없었다. 피붙이 선대들 모두 선산의 반원 그 봉분에서 영면하였지만 그들이 심은 유실수는 해마다 꽃 내고, 열매를 맺는다. 세태가 변해 사는 모습은 달라도 회두리에 우리 후손 역시 그런 운명이다. 아버지의 아들이 아빠 되고, 엄마의 딸이 어머니 되는 순환의 한뉘. 사람 한살이는 그런 둥근 고리를 잇는 역할이 아니겠는가?

수 ‘0’은 인도에서 유래했는데 7세기 아라비아인들이 사용하면서 ‘시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바로 ‘비어 있음’을 뜻하는 바 유럽에는 13세기 이탈리아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에 의해 도입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이 빈 수의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어떤 수와 곱하든 그 수를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영은 사탄의 수로 오해받을 법도 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다른 수에 붙이면 십. 백. 천. 만으로 무한 확장하는 회계상의 이점 때문에 마침내 수긍하고 말았다.

동양은 이미 9 다음의 수 ‘0’을 무, 없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석 류영모선생은 이런 개념을 사람은 누구나 ‘이’라며 풀어내셨다. 이는 0과 1이 합쳐진 것이다. 0이 무無이고, 1이 유有이니 곧 ‘없이 계신’ 자들이다. 유생어무- 그렇다. 노자 식으로 이승의 모든 것은 ‘없는 것’에서 온다. 더불어 다시 없던 것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숙명이다.

이승에 온 것들 그 무엇이든 가지 않고, 머물기만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무엇이든 가고 비워야, 오고 채워지는 법. 이런 이법을 도연명(365-427)은 ‘집은 잠시 머물던 여관이요, 나는 장차 떠나려는 나그네 같구나’ 라면서, ‘떠나서 어디로 가려는가, 남산에 옛집이 있다네’ 라고 노래했다. 오세영의 시 ‘열매’는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가 / 둥글어야 하는가 /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 좁쌀 같은 작은 고향 집 창문 너머의 자연은 결코 모나지 않고 순하고 조화롭기만 하다. 단절과 구획, 그 무수한 벽과 선의 도시- 도시 사람들은 무한한 수평선과 지평선을 잃어버려 병든다 했다. 물론 어디에서나, 무엇을 하며 살아도 가시나무처럼 마음속에 뾰족한 벽과 선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당에는 나무들 둥근 열매 맺고 한 해를 마감하는 이치를 궁리하며 자적한다면 얼마간 둥글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고향땅에서 자란 보리수 열매를 보며, 더 큰 본향의 집으로 떠난 숱한 이들을 되새겨 보는 여름이다. 아! 이제야 ‘가는 것은 굽히는 것이고 오는 것은 펴는 것이다’ 라는 “계사전”의 경구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편 것들 다시 굽어지며, 종당에 원을 그리며 사라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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