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껍데기는 가라. /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1930-1969) 시 ‘껍데기는 가라’(1967년) 부분

이승에 온 것은 그 무엇이든 죄다 간다. 불가에서는 성주괴공- 우주는 성립되었다가, 머물다가, 파괴되었다가 텅 비고 다시 성립되었다가 머무는 과정을 무한히 되풀이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한 번 ‘성주괴공’하는데 80겁의 대겁이 걸리고, 중겁의 20겁이 네 차례인데 1겁이 소겁이다. 생주이멸하는 사물과, 생로병사 하는 세상- 이런 이승의 인간은 무한히 살 것처럼 쇠붙이의 갑옷이나 총칼로 중무장하고, 공고히 성을 쌓고, 구획과 단절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문명사는 그런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반목과 질시에 함몰된 사람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라고 묵언으로 권면했다.

살아생전 신동엽 시인은 4월을 노래하며 껍데기는 모두 가라고 재촉했다.

그렇다. 알맹이를 감싼 껍데기가 썩어야 새싹이 움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힌다. 이는 저 유명한 T. S. 엘리엇의 시구 그 역설과 맥락을 같이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추억과 욕정이 뒤섞이고 꿈틀거리는 ‘4월’이 가고 있다. 매양 반복되는 4월이지만 무술년 2018년 개의 해는 그 어느 년도보다 각별하다.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분단된 남한과 북한의 정상이 38선 그 한가운데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65년간 삭풍과 엄동의 겨울을 이겨내고 마침내 봄날에 꿈처럼 만난 것이다.

이별이 너무 길다. / 슬픔이 너무 길다. /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 이별은 끝나야 한다. /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을 놓아 /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 문병란(1935-2015) 시 ‘직녀에게’(1976년) 부분

시보다 김원중의 노랫말로 더 익숙한 ‘직녀에게’- 사람들은 애잔한 맬로디에 얹힌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당위성을 담은 가사 그 시를 찾게 만들었다. 전남 화순에서 출생한 문 시인은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족과 통일’을 노래하는 참여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1979년 그의 네 번째 시집 “죽순 밭에서”가 출판되자 당국은 마침내 판금 조치를 내려버렸다. 문 시인은 그 부당함을 외치고 철회하라는 25쪽의 항의서를 제출하면서 정면으로 대항했다. 그러면서 평범하고 일상의 언어 자체인 시구는 시민들 사이에 확산되었고, 노래로 읽히게 되었던 것이다.

죽순 밭에는 /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 죽순 밭에는 / 낭자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 ... 갑오년 백산에 솟은 푸른 참대밭 / 우리들의 가슴을 뚫고 / 사무친 아우성이 솟아오르는 소리 / 안개 속에서 달빛 속에서 / 어둠을 뚫고 / 굳은 땅을 뚫고 / 모든 뿌리들이 일제히 터져 나오는 소리 - 문병란 시 ‘죽순 밭에서’ 부분

문병란의 ‘갑오년 백산’에서 시작된 4월 동학농민운동은 신동엽의 12월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을 끝으로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땅에서 나는 물산이 경제의 전부였을 때 농민은 그저 온당치 못한 ‘인간 대접’을 참다못해 죽순을 뽑아 들고 지배층에 저항했던 것이다. 한라에서 백두- 향그런 흙가슴으로 ‘하나’였던 백성들은 과연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김수영 시인의 ‘헬리콥터’의 ‘자유와 비애’를 톺아보지 않을 수 없다.

너의 조상들이 우리의 조상과 함께 / 손을 잡고 초동물세계 속에서 영위하던 /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을 / 너는 또한 우리가 발견하고 규정하기 전에 / 가지고 있었으며 / 오늘에 네가 전하는 자유의 마지막 파편에 /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다 - 김수영 시 ‘헬리콥터’(1955년) 부분

설움이 설움을 먹던 시절’ 그 겨울이 가고, 화창한 봄날도 이제 저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봄에 분명히 보았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그리다 보면 어느새 멋진 그림 작품 한 점이 완성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향그런 흙가슴’만 가득한 직녀와 견우가 만나듯,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하는 광경이 그려진, ‘모오든 쇠붙이’가 사라진 우리들의 땅이었다, 죽순들 삐죽이 예쁜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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