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태 박사 / 뉴스티앤티

시민혁명 이후 근·현대사회는 국민의 기본권으로 ‘평등’을 지향한다. 그것이 형식에 머물든 실질을 추구하든,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어쨌든 평등을 추구한다. 그래야 국민의 불만을 종식시켜 국가의 존립이라는 안정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에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절대 평등하지 않다. 유사 이래 과거도 불평등했고 현재도 불평등하지만 장담하건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평등사회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 모습일 뿐이다. 만약 이 사회가 평등하다면 국가의 근본법이자 최고법에서 평등을 논할 이유가 없다. 불평등이라는 불편한 진실인 인간의 역사와 현실에는 항상 ‘갑(甲)’과 ‘을(乙)’이라는 존재가 병존해 있다. 시대를 달리하고 종류를 구분하지만 어느 곳에나 힘을 가진 갑과, 그렇지 못한 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전적 의미의 갑(甲)은 두 개 이상의 사물이 있을 때 그 중 하나의 이름을 대신하여 이르는 말,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첫째를 이르는 말이고, 을(乙)은 둘 이상의 사물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둘째를 이르는 말이다. 사실 갑과 을의 어원은 법학을 배울때 쓰는 불특정한 주체를 순서대로 나열할 때 십간을 순서대로 사용하면서 생겨났다. 계약서에 자주 등장하는 "A(이하 을이라 칭함)는 B(이하 갑이라 칭함)에게…"로 시작하는 문장이 그것이다. 계약서 내용 전체를 사람 이름 또는 회사 이름으로 작성해도 상관없지만, 그럴 경우 서로 다른 사람들과 계약을 할 때마다 계약서 작성이 귀찮아지므로, 계약서 전체는 '갑'과 '을'로 지칭되는 대명사로 모두 작성해 놓고, 최상단에만 '갑이 누구인지', '을이 누구인지'만 써 넣도록 만든 것이다. 일반적으로 '갑은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사람(또는 회사)'이고, '을은 돈을 받고 일을 해주는 사람(또는 회사)'가 되어서 계약서를 작성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 갑의 횡포에 대한 사건들이 화두로 떠오르며 갑과 을의 새로운 파생명사 “갑질”과 동사 “갑질하다”가 나타났다. 사실 갑을 관계란 것은 요사이 새롭게 형성된 관계가 아니다. 또한 갑을 관계의 불평등도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아니 어쩌면 문제시 여겨지지 않았던 사실이 사회적으로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이유와 그에 대한 대책은 무엇일까?

을은 갑에게서 충성하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고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갑이 되고자 한다. 세상은 성공한 이들만을 갑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모두가 갑의 삶을 꿈꾸지만 사실 돌아보면 우리 모두는 갑이자 을이다. 대기업 사장도 소비자 앞에서는 을이 되며 말단 직원일지라도 하청업체 앞에서는 갑이 된다. 누구나 갑이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을이 될 수 있다. 결국 갑과 을 모두를 아우르는 삶이 살아남고 성공하는 비결이다.

경험에 비춰 학창시절 남자 아이들은 새로 학년이 바뀌면 학년 초에 집중적으로 싸움질을 한다. 이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 세계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여 지는 현상이다. 왜일까? 이는 알파수컷을 뽑기 위한 경쟁이 아닌가 싶다. 수컷들은 육체적인 대결을 통해서 서열이 정해지면 알파수컷은 많은 자원들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당연히 암컷은 그의 몫이며 좋은 먹거리와 편안한 잠자리도 보장된다. 이를 위해 수컷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경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싸움은 암컷을 두고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자원을 둔 것도 아니다. 이는 동물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남학생들의 싸움은 학년 초에 벌어지고 금방 끝이 난다. 그리고 1년 안에는 이러한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서열을 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열이 결정되면 1등을 보통 ‘짱’이라고 부른다. 즉 그는 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이 생기면 당연히 을도 존재하는 법이다. 또 갑조차도 한 학년 위의 선배나 선생님들에게는 철저히 복종해야한다. 그도 자신의 반이나 학년에서는 갑일지 모르지만 또 다른 세계에서는 을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갑이라는 지위와 을이라는 지위를 오가며 살고 있다.

실상 어떤 부분이나 사회에 있어 갑이라는 위치는 매우 소수가 점유하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을에 해당한다. 갑은 지배적인 위치에 있기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으며 을은 나름대로 갑이 되고자 처절한 경쟁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승리하는 자에게는 갑으로의 지위상승이 보장되며 이에 따라 그에 대한 대접은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또 사회에서 남자의 높은 지위는 짝을 만드는 데에도 아주 유리하다. 남자의 높은 사회적 지위가 여성에게 인기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에서 제시되는 대부분의 해법은 `노력해라. 그러면 을도 갑이 될 수 있다`는 역할 변화만을 주문한다. 여기에는 갑을관계가 갖는 권력적 속성이나 사회적 구조는 도외시된다. 이런 갑과 을의 관계가 온존하는 한 을이 갑이 되어도, 또 다른 을은 사라지지 않는다. 갑을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갑을관계는 이 사회에 필연적인가? 단순히 누군가 우월적인 지위를 누리고 다른 한쪽이 순응해야만 하는 관계는 사회 전체에 있어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소위 '제로섬(ZERO-SUM)' 게임일 뿐이다. 스포츠 경기로 치면 힘을 합쳐도 모자를 때에 같은 편끼리 싸우는 형국이랄까? 이처럼 갑을관계는 오히려 그 사회를 경직시키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소멸시킨다. 마치 과거 신분제 사회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갑을관계는 갑만의 문제일까? 과도한 갑질이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과도한 갑질을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였던 을들의 체질화된 태도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갑을관계'가 제대로 서기 위해선 그동안 인내만 해왔던 '을'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매장, 사무실이나 관공서에서도 서비스 이상의 인격무시적인 요구는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고발되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한다. 최근 분출되고 있는 갑을 문제는 갑을관계가 바로서기 위한 진통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을 없이는 갑도 없으며 을이 당당해야 민주주의가 바로 선다. 

또한 우리 사회의 모든 관계들을 갑과 을의 대립항으로만 바라보는 인식은 극복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함께 평등을 그 기초 원리로 하므로 평등이 보장되지 않은 자유시장체제만으론 민주주의는 전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갑을관계로 서열을 지려하고 그 안에서 안정성을 확보하려 한다.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삼형제가 하늘에 날아가는 새를 보고 제일 큰형은 ‘잡아서 삶아먹자’고 했고, 둘째는 ‘구워 먹자’고 했으며 막내 동생은 ‘맛있게 먹으려면 끓는 물에 데친 뒤 구워 먹자’고 서로 자기 생각을 주장하며 갑론을박 하는 사이 새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한 부정이나 극복이 아닌 서로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해하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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