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 전, 세계 최초 학생 반공운동 잊지 말아야'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 근대사는 추위가 하루하루 기세를 더해가는 11월에 잊을 수 없는, 슬프고도 역사적인 두 건의 학생운동을 경험했다. 
하나는 3일에 일어난 광주 항일학생의거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이다. 

두 의거 모두 그 중심에 뺨 붉은 어린 학생들이 있었다. 
우리 역사는 가다가 한 번씩 굴곡지고 매듭지어질 때마다 곧잘 어린 학생들을 소환해 제물로 삼아 왔다. 
그런데 광주 항일학생의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나 신의주 반공의거는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한반도 최북단 서쪽 끝에 위치한 신의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의주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 조성된 도시다. 
1906년 경의선 철도 개설과 함께 지금의 신의주역이 생기면서 이른바 역세권을 이뤄 발전했다. 

그리고 이 '신도시'가 의주의 중심이 되었다. 이성계의 회군으로 유명한 위화도를 가운데 두고 의주는 동쪽, 신의주는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해 있는 국경도시 신의주는 인구 36만의 평안북도 도청소재지이자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최대 관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코로나19 사태로 봉쇄된 상태라지만 북한 교역의 80% 이상이 이곳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76년 전 이맘 때, 이곳 신의주에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역사가 흔히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건의 현장 한가운데 함석헌이 있었다. 당시 그는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의 문교부장 직을 맡아 신의주에 머물고 있었다. 
자치위원회는 해방 공간의 무질서한 치안과 행정 공백을 메꾸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 이름 있는 독립운동가 이유필(李裕弼)이 회장이었다. 

함석헌은 사건의 전 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소련군과 공산당원들로부터 배후로 지목되어 자칫 목숨을 잃거나 시베리아에 끌려갈 뻔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뒤에 함석헌은 그가 겪은 사건의 전말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글을 남겨 역사적 증언이 되어 있다.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의거' 그에 의하면 사건은 전적으로 '해방군'을 자처하고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의 만행과, 이를 등에 업고 때를 만난 듯 완장질을 하던 공산당원들의 횡포가 빌미를 제공한 것이었다. 

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은 11월 18일에 있었던 '용암포 사건'이었다. 용암포는 신의주 남쪽 용천읍 관내의 해안 마을이다. 
당시 용천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공산당 지부 책임자이던 이용흡(李龍洽)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민대회를 열었으나 대회는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소련군과 공산당에 대한 성토장이 되고 말았다.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의 거듭된 만행과 횡포로 인해 쌓여온 불만이 터져나오고 만 것이다. 이튿날엔 이용흡의 역습이 있었다. 
동양경금속 적색노조 산하 적위대원들과 농민 2천500여 명을 동원해 수산학교 기숙사를 급습,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들의 무차별 폭력에 항의하던 신의주제일교회 홍석황 장로가 매맞아 죽음으로써 첫 희생자가 나왔다. 
21일, 신의주 시내 각 학교 학생 대표들이 동중학교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5명의 조사단을 용암포에 보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 소련군의 약탈행위, 평안북도 보안부장 한웅의 횡포, 만주로부터 귀환한 동포들에 대한 반인도적 처우 등이 보고되었다. 23일 아침 제일공업학교 강당에 모여 마지막 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궐기 방안을 결정했다. 
그리고 오후 두 시, 압록강 변의 한 목재소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신호로 3개조로 나뉜 학생 시위대가 각각 평안복도 인민위원회, 공산당 본부, 시 인민위원회 등을 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곧바로, 미리 낌새를 채고 있던 소련군과 지하에 대기하고 있던 무장 보안대원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왔다. 
인민위원회에서 13명, 공산당 본부에서 10명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는 홍석황 장로를 포함해 모두 24명, 중경상자는 700여 명에 달했다. 
사건 이후 붙잡혀 간 사람은 모두 2천여 명. 함석헌도 이 때 붙잡혀 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50일 간을 갇혀 지낸 뒤 풀려나 월남했다. 
붙잡혀 간 사람들 중 김성순, 이영춘 등 2백여 명은 소련군에 의해 동토의 시베리아로 끌려가 행방을 알 수 없이 되었다. 

23일 바로 그 현장에 소설가 선우휘도 있었다. 자전적 성격의 소설 '사도행전'(1966. 미완)에서 주인공 '이신'은 신처럼 생각하는 은사 '허윤'을 만나러 신의주에 갔다가 사건의 중심에 말려든다. 
허윤은 선우휘의 다른 소설 '노다지'(1979~1981)에서 '허선생'이란 이름으로 다시 소환되어 있다.

항일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 허윤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평북 인민위원회 교육부장 직을 맡고 있었다. 
이신은 공산당 본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당사에 몰려 들어온 학생들로부터 공산당원으로 오인되어 폭행을 당했다. 
총 맞고 쓰러진 학생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보안서원들에게 붙들려 사정없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학생을 선동했다는 혐의였다. 

허윤에게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김형원 목사는 신의주 사건의 배후로 몰려 시달림을 받다 월남길에 오른 중이었다. 
'사도행전'은 사건의 전모를 총체적으로 반영해 내지는 못했으나 제한적으로나마 사건 현장의 실상을 핍진성 있게 재현해 낸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김진성의 장편 '첫 기슭에서'(1984~87)에서 신의주 사건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선우휘의 '사도행전'이 반공 이데올로기 기조 위에 서 있다면, 김진성의 '첫 기슭에서'는 북한에서의 좌익 청년 조직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관점 위에 서 있는 상반된 성격을 띄고 있다. 

해방 후 맨 처음 일어난 '신의주학생반공의거'는 이후 함흥·길주·평양·해주 등지에서 일어난 반공 학생의거의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산화한 동유럽 국가들의 반공운동에 앞선 세계 최초의 학생 반공운동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사건은 북한의 기독교 세력이 소련 공산주의 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한 최초의 것이다. 
이 지역 기독교 지식인 계층이 대거 월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들 월남한 기독교 지식인들이 미 군정과 초기 이승만 정권의 반공 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사실을 감안하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다. 

정부는 1957년, 11월 23일을 '반공학생의 날'로 정하고, 의거 12주년이 되던 1968년에는 장충동 남산 기슭에 '신의주학생의거 기념탑'을 세워 기억을 공유해 왔다. 
그런데 1980년대 '민주화' 이후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지금은 아예 달력 속에서도 사라진 채 극히 일부 실향민들이나 반공 인사들만의 기념일이 되고 만 실정이다. 
역사를 '친일' 프레임에 가두어 우파 인사들을 모욕하고 흔적 지우기에 재미 붙인 좌파 정권을 거치는 동안 '친일'은 '조자룡의 헌창'이 되고 '반공'은 앨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금기어가 되면서 더욱 심화됐다. 

76년 전 11월, 추위가 이른 신의주 언 땅 위에 뿌린 어린 학생들의 피, 시베리아로 끌려가 흔적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의 한을 기억하는 일은 광주를 기억하고 세월호를 잊지 않고자 하는 노력 못지 않게 중요한 우리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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