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부분.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이 시는 한국현대 시사에 중요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제5공화국- 10.26, 12.12를 거쳐 ‘서울의 봄’과 5.17 광주를 짓밟은 신군부 세력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열린 해였기 때문이다. 시구대로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모두들 침묵한 시대- ‘자정 넘으면 /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저 흰 눈들 다 녹으면 새봄은 기어이 오고야 말리라. 왼편 가슴의 심장이 식지 않는 한 살아가리라. 속울음 참고 견디다 보면 ‘그리웠던 순간’ 같은 날이 또 오리라. 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1901-1943) 시인처럼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긴’ 백성에게 희망가를 노래한 것이다.

사평역이라는 간이역 대합실에서 마지막 밤 열차를 기다리던 80년대 사람들- 벌써 3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넉넉히 60대가 넘었을 것이다. 그날 마침내 막차는 왔을 것이고, 울고불고 사네 못 사네 해도 기차처럼 오고 가는 시간 속에 얼마간의 그리운 추억도 얼마간 쌓았을 터.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고, 친손들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몸과 마음 꼭 절반씩 빌려 온 이승. 다시 그만큼 내어주고 온 곳으로 돌아가는 순환에 순명하는 날들이다.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가 저 멀리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찢어지는 듯 슬픈 기적소리가 초원을 뚫고 울리다가 멀리 사라질 때면, 갑자기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솟구쳐 나는 쓸쓸한 심연의 가장자리에 놓인 것처럼 잠시 서 있곤 한다. - 프리츠 오르트만((1925-1995)의 단편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 마지막 문단

유럽의 한 신혼부부는 결혼하자마자 곰스크행 특급열차를 탄다. 남편이 오래전부터 아버지에게 들었던 살기 좋은 고장- 내 원래의 존재가 시작된 그 도시로 가는 초원을 가로지르는 칼날처럼 매끈한 철길에 몸을 실은 것이다. 여행 둘째 날 그들은 한 역에서 두 시간 정차한다는 승무원의 말에 동네 구경에 나선다. 내친김에 언덕에 오른 부부는 옹기종기 모인 집과 농장, 학교, 목조교회 풍경에 빠져 그만 기차를 놓치고 만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그 마을에 정착한 부부. 신랑은 나이가 들어 병든 선생님을 대신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신부는 동네허드레 일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남편은 곰스크로 가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늘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둘째 딸애가 태어나면서 의지가 약해진다. 마침내 노 교사는 유언처럼 말한다.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 속에 사는 것이 의미 없는 삶은 아니지요...”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슬픈 기적 소리’에 젖어들곤 한다.

여기에서 두 작품이 발표된 해가 곰스크가 1979년, 사평역은 1981년이니 아주 비슷한 시기다. 어쩌면 곰스코의 부부가 사평 그 어느 동네에서 살다가 밤 열차를 타기 위해 간이역 대합실에 갔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대지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여행자들이다. 여행은 여기를 벗어나, 거기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는 행위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산책일 수도 있다. 꼭 기차를 타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우리는 목적지가 다르지만 이미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적시한 작품이 바로 “책상은 책상이다”에 수록된 페터 빅셀(1935- )의 우화 ‘기억력이 좋은 남자’이다.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이나 열차를 타는 거야. 기억력이 좋다면 사람들은 나처럼 출발 시간과 도착 시간을 외울 수 있겠지. 그러면 굳이 그 시간을 체험하기 위해서 열차를 탈 필요가 없는 거야.

그 ‘어떤 남자’는 스위스 한 역의 시간표를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매일 대합실에서 여행객들을 붙잡고 어느 역을 거치는지, 식당칸이 있는지 없는지, 우편물 수송을 하는 열차인지... 말곁 했다. 정작 본인은 기차를 타지 않고 사람들을 귀찮게 했던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자 역장은 얌전히 앉아 있지 않으면 대합실에서 쫒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 후 사내는 혼잣말하며 오가는 기차를 구경할 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 뒤에 역에 안내사무소가 문을 열었고, 역무원이 책을 들추며 모든 열차의 궁금증을 척척 일러주었다. 그러자 사내는 집안에 있던 열차시간표를 불태우고, 이번에는 도시 건물마다 ‘계단’의 수를 외우기 시작했다. 종당에 그 사내는 모든 층계의 수를 다 외우게 되었고, 드디어 표를 사고 처음으로 기차를 탔다. 그 남자는 지금, 한국 어느 도시의 ‘계단’을 세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 공무원도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알기 위해서 말이다.

이제 곧 사람들과 함께 동장군을 물리친 봄꽃들이 만발한다. 여기저기 패잔병처럼 꽃을 내지 못하거나, 더욱 실해진 초목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살피며 위무하러 봄놀이를 떠난다, 기차를 타고. 봄 햇살 그 찬란한 빛은 겨울의 감옥에서 풀려난 이들에게 자유를 싣고 온 기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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