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철 부산취재본부장

조반니 보카치오의 대표작 '데카메론'은, 페스트가 창궐하던 피렌체의 한 성당에서 우연히 만난 열 명의 남녀가 도시 근교의 별장으로 피신해 격리 생활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하루에 한 사람씩 왕이나 여왕 역할을 하면서 모임을 주재했고, 열흘 동안 나눈 백 편의 이야기로 암울한 시기를 견딜 힘을 얻었다.

14세기 중반, 유럽은 페스트로 인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는 참극을 빚었다. 2,500만 명 넘게 희생된 것이다.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피해가 컸던 전염병이었다. 대재앙에 충격을 받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집필했고, 첫머리에 자신이 겪은 참상을 묘사했다.

'아아, 그 많은 대저택들, 호화로운 집들, 수많은 하인을 거느린 귀족들, 신사들과 숙녀들, 그리고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사라져 버렸으니! 아아, 그 많은 유서 깊은 혈통과 막대한 유산과 위세당당한 재력이 적절한 상속자도 없이 남겨졌으니!'

팬데믹(pandemic, 전염병 대유행)이 몰아친 지난 2년 동안 우리 사회는 아노미의 수렁에 빠졌다. 한국전쟁 이후 크고 작은 환란의 시기가 있었지만 이토록 공동체가 작동을 멈춘 적은 없었다. 접촉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700년 가까이 잠들었던 중세의 페스트가 부활한 듯 세상은 얼어붙었고, 사람들은 파편화되었다.

'베리드'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라크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주인공은 테러범의 습격을 받고 나무관 속에 갇히게 된다. 관은 모래에 묻혀 있어서 탈출이 불가능했다. 사막에서 산 채로 매장된 것이다. 관 속으로 모래가 들어오면서 그가 숨쉴 공간은 점점 줄었고, 희망도 함께 이울어갔다.

코로나19는 강력했고, 사람들은 관 속에 고립된 영화의 주인공처럼 외부와 단절된 일상의 벽에 갇혔다. 모래가 관의 공간을 잠식하듯이, 바이러스는 삶의 공간을 조여 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이런 질곡의 시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미래의 전망은 녹록지 않다. 

알베르 카뮈는 1947년에 발표한 소설 '페스트'에서, 페스트균은 결코 소멸하지 않고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견했다. '대유행병의 시대'를 쓴 작가 마크 호닉스바움도 "카뮈가 옳았다. 전염병은 예측할 수 없을지언정 반드시 되풀이된다."며 카뮈의 손을 들어주었다. 생물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바이러스의 유행 주기가 3년, 5년으로 짧아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최 교수는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근본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이 자연을 훼손하면서 동물의 서식지를 들쑤시게 되고, 그 결과 야생동물 몸에 있던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적 전환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한다. 

'팬데믹 패닉'을 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도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후변화에 대해 영국 BBC 방송 내용을 인용했다. "기후변화는 수천 년 동안 얼음 상태였던 영구동토층을 녹이고 있으며, 그 토양들이 녹는 바람에 그동안 잠자고 있던 고대의 바이러스들과 박테리아들이 풀려나 소생하고 있다."

인류는 페스트, 스페인독감, 홍콩독감 등 팬데믹의 고통을 기어이 버텨냈다. 코로나19의 광풍 속에 있는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앞으로도 세균과 바이러스는 꾸준히 살아남아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다. 

'데카메론'의 열 번째 날에 백 편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왕으로 선임된 판필로는 자리에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팬데믹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보카치오는, 판필로의 입을 빌려 후대에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매혹적인 부인들이여! 여러분도 다 아실 줄로 믿습니다만, 인간의 지혜란 단순히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거나 현재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지혜로 평가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앎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현자들은 말합니다."

이달부터 '단계적 일상회복'이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되찾기 위해 희망의 불을 조심스레 지핀다. 부산 화명생태공원 일원에서 열리고 있는 작은 행사 '구포나루 愛, 희망백신을 놓다'도 그런 염원을 담은 마중물이다. '희망백신'이 일상회복으로,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최고의 지혜로 이어질 수 있을까.

 

배종철 논설위원 / 뉴스티앤티
배종철 / 부산취재본부장

전 진주MBC 프로듀서
전 부산방송 KNN 프로듀서
문예운동 수필 천료(2005)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키워드

#배종철 #시선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