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가르기 복수는 또 다른 분노와 복수를 잉태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황석영의 '손님'(2001)은 1950년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극을 제재로 한 소설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에서 12월 사이 50여 일 동안 황해도 중서부 지역인 신천읍, 온천면, 궁흥면 등지에서 좌.우 세력 간의 잇단 충돌이 일어났다.
그 충돌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흔히 '신천학살사건'으로 불리지만 좌파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과 북한에서는 '신천대학살사건'으로, 우파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신천10.13반공의거'로 부르기도 한다. 

사건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가자 퇴각을 서두르던 인민군과 좌익계 민청 간부들이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우익 인사들과 그 가족 수백 명을 학살한 것이 발단이다. 

이 와중에 지하에 숨어 있다가 국군과 유엔군의 진입에 고무된 반공 청년 학생들이 무장 봉기하여 좌익 세력과 5일 간 혈전 끝에 신천군 전역을 장악했다. 
이번에는 남아 있는 좌익 가족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구월산에 숨어든 좌익 빨치산들과 우익 청년 학생들 사이의 충돌로 크고 작은 보복극이 계속되던 중 10월 19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을 따라 다시 내려온 좌익들의 보복 학살극이 뒤를 이었다. 
거듭된 복수극에 희생된 사람이 당시 신천군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천여 명에 달한다는 것이 북한 측 주장이다. 
학계에는 과장 가능성이 많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으나,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에 담아냈을 만큼 다른 나라에까지 알려질 만큼 대규모의 참혹한 학살극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북한은 신천군 현장에 '미제 양민학살 기념관'을 세우고 반미 선전 활동에 이용하고 있다. 

그 때의 참상을 '손님'에선 작중 인물의 증언을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나넌 소메루 돌아갔다. 촌사람덜언 멀리 나댕기지두 못했디. 언제 삐끗해서 놈에 눈총얼 받구 죽을디 알갔나 말이야. 
45일 동안 날마다 죽음언 도처에 있댔으니까니. 3만5천 명두 넘게 죽었다고 하디만 모르긴 해두 아마 사실일 거이야. 

거게다 서남쪽에 몰린 채루 본대와 떨어진 패잔병덜이 신천에서 북상길이 막히자 많이 잡헤 죽어서. 기러구 유격대가 구월산에서 양식 구하러 내레왔다간 쥑이기도 하구 청년단이 저쪽 식구덜얼 찾아내 쥑이기도 하구. 원암리 창고에서 400명의 부녀자하구 아이덜 102명 살해한 건 나중에 주검에 남아 있고 그 틈바구에서 살아난 아이두 있댔으니 엄연한 사실이갔디.
군(郡)내 총 인구의 1/4이 죽어서. 궁흥면 만궁리에선 리 인구 거이 대부분이 사라 졌구 온천면 용당리에선 절반 이상이, 신천리 양장리에선 남자 전원이 죽었다.'

거기에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구별은 없었다. 가족처럼 지내던 이웃 간의 정이나 의리, 삼촌이니 아저씨니 하는 혈연의식도 없었다. 
오로지 이편이냐 저편이냐의 구별만 있을 뿐이었다. 

북한에서는 인민군과 좌익들의 만행을 숨기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기 위해 모든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고 있지만 거짓이다. 
거기에 미군은 없었고, 오직 우리끼리 패를 가른 좌와 우,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맞서 분노와 복수의 피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작가는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기독교-우익 측에 더 많은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러나 책임을 묻고 따지는 일은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고 소망스럽지도 않다. 

자칫 묵은 상처를 덧내어 또 다른 상처를 깊게 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이 어이없는 비극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곧잘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우리 안의 악마적 심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분노와 복수는 이편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가장 편리한 수단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편의 분노와 복수가 저편의 분노와 복수를 자극하여 또 다른 분노와 복수를 자극한다는 데 있다. 
이렇게 해서 분노와 복수는 계속하여 몸집을 불리고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분노가 분노를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으며 확대 재생산되는 광기의 결말은 뻔하다. 공멸, 함께 망하는 길밖에는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굳이 종교적 이념에 기대지 않고도 이해와 사랑, 관용과 화해가 분노와 복수 이상의 가치임을 알 수 있겠다. 
그러나 분노와 복수의 대상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사람들은 곧잘 분노와 복수의 길로 빠져든다. 

여순반란사건을 제재로 한 김동리의 '형제'(1949)는 역시 좌.우로 갈린 형제 사이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남로당원인 아우는 우익인 형에 대한 분노로 어린 두 조카를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분노한 형이 토벌대에 합류해 아우에 대한 복수를 벼르지만 정작 숨어서 공포에 떨고 있는 조카를 발견하자 마음을 바꿔 조카를 위기에서 구한다. 

작가의 우익 편향적 시각이 시비의 대상이 되고는 있으나 분노와 복수 이상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관용과 사랑이 최선은 아니다. 저편의 분노나 범죄로 희생된 사람의 피해나 상처가 영원히 보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관용과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이상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전두환 .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투옥된 것은 1995년의 일이었다. '군사 반란'이 주된 죄목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22년 6개월의 형이 주어졌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형량이다. 

그러나 이들은 불과 2년 남짓 만인 1997년 12월 모두 석방되었다. 
같은 해에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들은 한결같이 사면과 복권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새 대통령 당선자와 합의해 이들을 사면했다. '국민대화합'이 명분이었다. 
일부 반대 여론이 없지 않았으나 심각한 국론 분열은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2017년 3월 31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1년 뒤인 2018년 3월 22일 구속되었다. 
신병으로 인해 병원을 오가는 처지인데도 각각 5년 4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수감 중이다. 
이들의 죄가 '광주 학살'과 군사반란죄보다도 더 중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복수치고는 옹졸하기 짝이 없고, 통치라기엔 잔인하기 그지없다. 

절제되지 않은 분노와 복수극이 자행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몸속의 종양처럼 크기를 더해가는 또 다른 분노와 복수가 걱정스럽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분노와 복수의 생리를 모를 리 없으니 앞으로 6개월, 국정은 또다시 거대한 음모와 술수와 모사꾼들의 춤판이 될 것이다.

황해도 신천에서 복수극의 집단적 광기가 아비규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빚어내던 때가 71년 전, 꼭 이맘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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