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유(大有), 동인(同인) 다 함께 보다 은밀하고 추한 의도나 동기 함유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446년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나 말 따로 글 따로인 우리의 언어생활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일부에서 한글을 쓰는 사람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주류는 한문이었다. 
한글이란 기껏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나 쓰는 상말(諺文)이라거나, 여자들이나 쓰는 '암클'이라는 인식이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온 세상이 다 명나라의 것'(大明天地)이라거나, '어떤 곡절이 있더라도 명에 대한 충성은 변함이 없을 것'(萬折必東)이라는 뼛속 깊이 새겨진 사대의식 때문이었다.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어린 백성'들로 하여금 문자 생활의 편리함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자 한 세종대왕의 뜻과는 달리 절대다수의 백성들은 여전히 문자로부터 소외되어 왔다.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조선이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매몰돼 있던 상층 사대부들은 한자로 된 저들의 경사(經史)나 시문(詩文)들을 금이나 옥처럼 여기면서 지적 우월감을 즐겼다. 

왕조 후기, 세상 보는 눈이 밝았던 연암 박지원은 비록 한문이지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새로운 문장을 시험하다가 목숨을 잃을 위기를 겪기도 했다.
'문체반정' 세상은 넓어 중국 외에도 수많은 나라들이 있고, 이들 나라들은 각기 그들 고유의 말과 글을 쓰면서 앞선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19세기 말이나 된 뒤의 일이다. 

애국. 계몽운동가들 사이에서 한글의 가치가 재발견되고,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던 때를 전후하여 문자 독립운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앞서 1894년 7월, 조정에서는 의정부 학부아문에 국문표기법의 규정과 국문교과서 편집을 담당하는 편집국을 신설하였으며, 11월에는 모든 법률과 칙령에서 국문을 기본으로 삼고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칙령을 공포, 국문 사용을 모든 공적인 언어 문자 생활에서 공식화했다. 

이 같은 국문 문장 운동에 선구적인 인물이 유길준이었다. 그는 1895년에 간행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한글 문장의 필요성을 적극 주창했다.
민지의 계발을 도모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문체가 평이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글'을 쓰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취지다. 

한자의 위세가 강한 시의(時宜)를 거스를 수 없어 할 수 없이 국한문 혼용체 문장을 쓰기는 하지만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아주 버리고 우리 글을 사용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독립신문', '그리스도신문', '대한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순 한글 신문의 창간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유사 이래 길들여져 온 한자와 한문 투 문장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문 쓰기를 고집하는 지식인들의 저항이 여전한 채로 한편에선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쓰는 국한문혼용체 문장이 널리 쓰였다. 
한자에 토를 달아 쓰는 문장도 있었다. 

점차 한주국종(漢主國從)의 문장에서 국주한종(國主韓從)의 문장으로 변해가는 양상을 보인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문자만 한글로 바꾼다고 문자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과 글이 일치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수천 년 동안 말과 글이 다른 모순된 언어생활에 익숙해 있는 터에 말과 글이 하나 된 '언문일치'의 문장을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혁명에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해조는 1910년에 간행된 신소설 '자유종'에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한문을 폐하고 국문을 쓰는 데 '오십 년 가량'은 걸려야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런데 이 일을 단박에 이뤄낸 사람이 있다. 바로 춘원 이광수다.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이광수의 '무정'이 언문일치체 문장을 완성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라는 점은 널리 공인된 바다. 
김동인이 자기가 주도해 조직한 '창조파'의 공이라 주장한 적이 있으나 객기일 뿐이다. 

문장을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이 쓰자는 신문장 운동은 오히려 육당 최남선의 선구적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신문장 운동의 요람인 '소년'(1908), '아이들 보이'(1910), '청춘'(1918) 등의 간행과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통해 한글 운동의 발상지가 된 '조선광문회'(1910)를 조직한 사실만으로도 한글 운동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은 충분히 입증된다. 
그런 그도 정작 완전한 언문일치체 문장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1919년 그가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이보다 두 해 먼저 발표된 '무정'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 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려쪼이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 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참으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 할 만하다. '친일'의 굴레를 씌워 흔하디흔한 문학비 하나 세우지 않고 있지만 잘하는 일 아니다. 
다른 것 말고, 우리의 문자 생활이 지금처럼 쉽고 편리하게 하면서 한글의 위대성을 입증해 보인 선구적인 공로만으로도 이광수는 충분히 기념비적인 존재다. 

'화천대유(火天大有)', '천화동인(天火同人)'사건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처음 사건이 불거지자 사람들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그것이 무슨 회사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도 한참 뒤의 일이다.
그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낯설기 짝이 없는 이 이름의 원천은 유교의 기본 경전 중 하나이자 점술가들의 경전격인 '주역'이다. 
흔히 '역경'이라고도 불리는 이 경전은 '시경', '서경'과 함께 삼경의 하나이면서 가장 읽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읽기도 어렵거니와 읽어도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워 쉽게 도전하기가 어렵고, 도전하더라도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뜻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 것이 '주역'을 읽는 일반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내로라하는 법조인들이 상당수 관계되어 있는 이 '회사'의 작명 과정에 이름 있는 역술인 또는, 도올 김용옥 교수만큼이나 해박한 한학자가 거들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대중 친화적인 우리말 이름과는 달리 대중 소외적인 한문 이름은  도무지 시대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 자체부터 이재명 지사가 한사코 주장하고 있는 '공익'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것임을 말해 준다.

'하늘의 도움을 얻어 천하를 얻는다'는 뜻의 '화천대유'나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어 마음먹은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천화동인'은 이름을 지을 때부터 벌써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 치도 없었던 것이다.

'대유(大有)'에서는 단번에 천금이나 대권을 움켜쥐고자 하는 속악한 야망이, '동인(同人)'에서는 비밀스럽게 끼리끼리만 나누고자 하는 복숭아 밭 결의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랏말 업신여기고 크고 강한 나라 말을 높여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이처럼 추하고 속된 의도나 동기가 숨겨져 있기 일쑤다.

'화천대유' 소동 속에 맞는 한글날이 유독 더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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