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착윤노수斲輪老手- 이 한자성어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유래했다.

“한마디 여쭙겠습니다만 지금 읽고 계신 책이 누구 것인지요?”

중국 제나라의 환공이 같잖다는 듯이 응대했다.

“이 사람아! 당연히 성인의 말씀이지.”

수레바퀴 구멍 깎기의 장인 윤편이 돌직구를 날렸다.

“지금 그 성인이 살아 계십니까?”

환공은 감히 고관대작이 독서하는데 끼어든 목수가 괘씸해서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죽여버리겠다! 그런데 윤편은 태연히 수레바퀴 깎는 일을 늘어놓았다. 70평생 바퀴살이 모이는 구멍을 깎았는데 조금이라도 더 깎으면 헐해지고, 작게 깎으면 빡빡해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일은 손 짐작으로 맞출 뿐 결코 자식에게조차 말로는 전수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성현들의 말씀이 적힌 책을 그저 부지런히 읽는다고 그 참뜻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손에 든 책은 그들의 말 찌꺼기일 뿐이다. 옛사람들도 입으로 전해줄 수 없는 속내 그 참뜻과 함께 돌아가신 것이다. 잠자코 있던 환공은 빙그레 웃으며, 윤편에게 안주가 풍성한 술상을 하사했다.

<장자> 외편의 ‘천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대청마루의 대감과 마당에 선 노장인의 한판 대거리가 눈에 선하다. 높은 탕건을 쓴 조정 대신에게 스스럼 없이 말을 건네는 것으로 보아 노인은 오래된 가솔인 듯하다. 일이관지- 하나의 진리만 깨치면 세상사 모든 것을 꿰뚫는다 했다. 한평생 권문세가의 수레만 전담해서 제작하고, 수리하던 윤편 역시 그런 경지에 오른 장인이었다. 참다운 이치나 진리를 깨치지 못하고, 서책만 읽어대는 백면서생 고관 나리가 불민하게 보였을까? 언젠가 작심하고 대감만의 ‘자기 소리’를 내라고 충언할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화에서 나무를 깎아 수레를 만드는 “경험 많은 달인”을 일컬어 착윤노수라는 부르게 되었다.

이 비유에 앞서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책을 중시한다 해도, 나는 귀한 게 못된다 생각한다.” 고 분명히 밝혔다. 맹자 역시 “책의 내용을 다 믿는니 책이 없는 게 낫다.”고 했고, 순자도 “잡된 기록의 책이나 공부하고 <시경>과 <서경>을 따르는 것”을 반대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책’에 기록된 성인들의 말이 보잘것없다고 판단했을까? 무엇보다 책의 내용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궁리하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하다고 주창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절대화를 반대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학문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논리다. 그렇다. 어떤 수레든 바퀴살이 모인 두 ‘구멍’ 때문에 굴러간다. 여기에서 수레의 크기에 따라 바퀴살의 너비나 두께가 적힌 책이 전해진다 치자. 그러나 그것은 제작원리를 밝혀 놓은 것일 뿐 실질적인 제작현장에서는 크게 유용하지 않다. 사실, 바퀴살의 나무 재질이나, 건조 상태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반복되는 실수를 통해 숙련된 손길에서 명품 수레가 탄생하는 법. 전해지는 책으로는 도저히 그런 ‘비책’을 전수 받을 수 없고, 오로지 자신만의 ‘수’를 체득해야 새로운 수레를 만들 수 있음은 자명하다.

독서망양- 말 그대로 독서하다가 양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이 일화 역시 <장자> 외편의 ‘변무’에 보이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노예인 장과 곡 두 사람이 양을 치고 있다가 둘이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먼저 장에게 어찌 된 일이냐 물었더니, 죽간 서책을 끼고 독서하다가 그렇게 됐다는 답변이었다. 이번에는 곡에게 물으니 기가 찬 답이 나왔다. 바로 노름을 하며 놀다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장자는 두 사람이 저지른 짓은 다르지만 양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평했다. 또한 수양산에서 불에 타 죽은 백이나, 동릉산에서 처형당한 도적이나 죽은 곳은 다르지만 목숨을 헤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것은 똑같다 덧붙였다. 둘 다 자신의 몸을 희생한 것인데 군자나 소인이라 칭해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소요유 무위자연- 도가적인 입장에서 세계관을 설명하다 보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일면 수긍이 가는 예화다.

오늘날에 이 독서망양은 ‘다른 일에 정신을 뺏겨 정작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장자시대로 돌아가면 참으로 진묘한 뜻이 담겨 있다. 유가의 인과 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런 인위적인 규범을 벗어나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생활, 인간의 본성을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누리는 ’자연스런 삶‘. 장자는 인간의 테두리에서 군자와 대인, 소인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세속적인 이분법에 반기를 들고 비웃었던 것이다. 온 천하 사람들이 길을 잃고 있다며 외친 장자의 길- 그것은 곧 사람마다 스스로 터득해야 열리는 인생길이다. 그나저나 책 읽는 데 얼마나 빠졌으면 양이 도망가는 줄도 몰랐을까? 비록 양을 잃어 버려도 좋으니 책 읽고, 글만 쓸 수 있는 날이 올까 짜장,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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