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원 정치학박사 / 뉴스티앤티

평창동계올림픽 개회가 한 달 남짓한 시점. 남북한의 대화 물꼬가 터졌다. 늘 그렇듯이 남북은 덕담으로 시작했다. 북측은 ‘민심과 천심’을 거론했다. 참 세상 많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내부에 상존하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갈등. 이른바 ‘남남갈등’을 의식한 ‘촛불민심’을 상기시키려는 속셈인가. 워낙 오랫동안 대화채널도 닫혀있던 시점인지라, 쌍방이 주고받는 덕담도 무겁게 다가온다.

냉전 체제에서 경험했듯이 사회주의 국가들이 먼저 협상제안을 할 경우엔, 자신들의 대내외적인 위상과 처지가 불리할 경우가 정설이다. 이런 인식은 국제정치의 경험론적 판단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신들이 힘든 처지가 아니라면, 게다가 상대로부터 얻어낼 게 없다면 협상거부와 으름장을 보여줬던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협상전략이다. 북한은 아직도 이런 고전적 협상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북핵에 매진하면서 아쉬울 게 없다(?)던 북한이 그동안 대화에 나 몰라라 하다가, 국제사회의 옥죄기가 구체화 되자 이제서야 협상에 임하는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북대화의 절실함을 내비쳐 왔다. 진보정권에서 전·현직 통일전문가라는 인물들의 훈수도 작용했겠지만, 북한으로선 협상에 나설 환경이 숙성되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문 정권은 촛불집회로 탄생한 태생적 한계 즉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말 못할 고심을 안고 있다. 문 정권이 맘에 들어서 그리고 평창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협상에 임한 것이 아니라, 북한은 자신들이 불리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런 일면은 만나자마자 통크게(?) “다 까놓고 하자”는 제안에서 잘 읽혀진다.

김정일 측근들도 하나 둘 처형되는 살벌한 처지인지라, ‘민심과 천심’은 북한이 더 챙겨야 할 대목이다. 책상 위에 핵단추를 놓고 있다는 것은, 협상에서의 기선을 잡으려는 으름장이다. 미국은 이미 북핵 관련 플랜을 여러 개 준비해 놓고, 상황을 신중하게 주시하면서 북한 옥죄기에 나서고 있다. 이렇듯 북핵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압박이 거세지고 외화벌이의 통로마저 서서히 막혀버리자, 내부 경제의 어려움에 봉착한 북한입장에선 “선(先) 대화제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지금처럼 우파와 좌파 간의 끊임없는 갈등 정국에서, 북한은 이상주의적 민족주의를 불어 넣을 수 있는 호기로 볼 것이다. 대규모 대표단과 응원단 심지어 예술단 파견까지 염두에 둔 모양인데, 이를 지켜보는 우리 국민들의 감성과 감정을 후비고 들어 올 비장의 무기인 셈이다.

지금까지의 남북관계사를 살펴보면, 상시적 걸림돌로 ‘쌍방 간의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믿지 못하기에 서로 자주 만나서 사안을 숙의하면 얼마나 바람직할까만, 쌍방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대화의 단절과 속개를 거듭해 왔다. 이번에도 그런 사례의 면모를 다분히 지니고 있기에, 차분하고 진중하게 접근해 나가야 한다. 상대가 원한다고 무조건 내준다면 협상의 진정성과 지속성을 훼손하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북한은 늘 자신들이 아쉬울 때 협상에 임했고, 늘 자신들의 이득을 챙겨갔다. 국민의 입장에선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참고 견뎌왔다. 진보 정권의 속칭 통일전문가들의 훈수. 이들 역시 직접 경험한 북한과의 협상에서 명쾌한 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아직도 부질없는 기대와 허상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런 탓에 이들이 제시하는 한미동맹 약화와 미군철수를 염두에 둔 해법은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평창올림픽은 우리가 어렵게 따낸 결과물이다. 이런 축제의 장에 북한은 아무런 수고 없이 숟가락을 얹는 격이다. “통 크게 하자”는 북한의 큰소리가 “통 크게 나눠먹자”로 들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북한은 오히려 남한이 목메어 대화를 원하기에 민족적 차원에서 우리를 돕겠다는 선전-선동 코스프레를 펼칠 것이다. 일부 우파 쪽에선 이번 협상을 북한 옥죄기의 기회로 보고 있다. 좌파는 평화와 통일을 향한 계기로 여기는 것 같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다 보니, 협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확연하다.

협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설득하는 고도의 행위다. 선의의 양보와 베풂만이 최선은 아니다. 이 대목에선 이전의 진보정권의 퍼주기 정책이 떠오른다. 더군다나 목전의 작은 이익에 치중하면 백전백패다. 길고 험한 그간의 남북한 대화를 통해 쌍방은 협상의 전략과 노하우를 충분히 축적해두고 있다. 상대의 의도와 속셈을 이젠 알 만큼 알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더욱 우려되는 것은 작은 이익을 위해 그리고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 들 때 닥쳐올 상황이다. 북핵 탓에 한반도는 엄중하고 불안한 하루하루다. 그간에 위태롭게 지속되어 온 한반도의 ‘冷(냉)평화’(cold-peace)가 ‘뜨거운 전쟁’(hot-war)으로 치달을지 모르는 위중한 시점이다.

평창에서 ‘차가운 평화'가 얼마나 녹여질지, 우리에겐 기회와 도전이 함께 다가오고 있다. 정부는 지나친 의욕과 욕심을 자제하고 차분하게 응해주길 기대한다. 쇼통(show-通(통)에 능한 지도력은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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