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직공정려각대전문화재자료 제36호 (1994. 6. 7 지정), 대전 대덕구 송촌동 179조선 중기 문신인 죽창 이시직(1572∼1637)의 충절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이다.이시직은 인조 2년(1624) 문과에 급제하여, 같은 해 이괄의 난이 터지자 인조임금을 모시고 공주까지 수행했다. 그 뒤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봉상시정 등의 벼슬을 지냈다.인조 13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들어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하인에게 자기를 매장하도록 부탁한 후 목을 매어 자결했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됐으며, 나라에서 ‘
고흥류씨 정려각 및 비대전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25호 (1996. 3. 27 지정), 대전 대덕구 중리동 498-1낮은 야산에 남향으로 세워진 유씨 부인(1371∼1452)의 정려각이다. 유씨 부인은 유준의 딸로서 진사 송극기에게 시집갔으나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네살난 아들과 함께 회덕의 시댁에 내려왔다.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을 잘 보살펴 훌륭히 키워 낸 부인은 조선 효종 4년(1653)에 열녀로서 정려각이 세워졌다.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4면에 붉은
질현성대전기념물 제8호 (1989. 3. 18 지정), 대전 대덕구 비래동 산 31-1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질현성은 질티고개 북쪽 정상의 산세를 이용하여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800m이다.모서리를 다듬은 사각형의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아래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 쌓았고, 군데군데에는 조그만 돌을 끼워넣었다.동·서·남벽 3곳에 문터가 남아있는데, 이중 남문터는 너비 3.8m로, 성으로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이용됐다.성 안에서 백제, 신라의 토기조각과 조선시대 자기조각이 출토되어 이 성이 삼국시
옥류각대전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7호 (1989. 3. 18 지정), 대전 대덕구 비래동 467조선 효종 때 대유학자였던 동춘당 송준길 선생을 기리기 위해 1693(숙종 19)에 제월당 송규렴이 중심이 되어 세운 누각(樓閣)이다.옥류각은 계족산 자락에서 흘러내려 온 골짜기를 가로질러 세웠는데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건물이 앉을 자리만 다듬고 건립하여 자연과 일체된 건축미를 보여준다.옥류(玉溜)란 골짜기에 '옥(玉)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뜻으로 계곡의 아름다움을 따서 건물 이름으로 삼은 것이며, 옥류 대신
계족산성사적 제355호 (1991. 10. 25 지정), 대전 대덕구 장동 산 85계족산성은 삼국시대 때 대전이 신라의 침입을 방어하는 관문 역할을 하면서 많은 산성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중심역할을 했던 산성이다.계족산 봉황정에서 북동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산봉우리에 머리띠를 두르듯 돌로 쌓은 산성이다.남북으로 긴 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며, 둘레는 1,037m로 대전광역시 안에 있는 산성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계족산성에는 문터가 동쪽·남쪽·서쪽 벽에 하나씩 있고, 건물터는 북쪽 벽에 2개·서쪽 벽에 3개·남쪽 벽
우암사적공원 남간정사대전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 (1989. 3. 18 지정), 대전 동구 가양동 65번지이곳은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선생이 '흥농서당(興農書堂)'과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세워 많은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며 병자호란때의 치육을 씻기 위한 북별책을 강구하였던 곳으로 정절서원(靖節書院)과 우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종회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낮은 야산 기슭에 남향하여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 후기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가르치
회덕향교 대성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1989. 03. 18 지정), 대전시 대덕구 대전로 1397번안길 126회덕향교는 조선초기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 1600년 경에 다시 세웠고, 그 후 1812년(순조 12) 가을에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이 향교는 입구쪽에 홍살문, 그 뒤에 솟을삼문형으로 외삼문을 세웠다.대문 바로 안쪽 건물에는 중앙으로 통행할 수 있는 문을 두었고, 문의 동쪽 건물에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을 서쪽에 공부하던 서재를 배치하였다.이 건물 뒤편에는 수업을 받던 명륜당(明倫堂)이 있
옥주 사마소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1987. 03. 31 지정),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67-6 문화재사마소는 조선 중기 이후 지방의 고을마다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친목과 한문, 정치, 지방 행정의 자문 등을 논하던 곳이다.그러나 점차 압력 단체로 발전하여 폐단이 컸으므로 선조 36년(1603)에 없앴으나 지방에 따라 그 폐단이 지속되기도 하였다.옥주사마소는 효종 5년(1654)에 의창(義倉)을 뜯어다가 지었다.당(當)안에는 '관성사마안', '향약계안', '옥천군향약계규약'
육영수 생가지충북기념물 제123호 (2002. 04. 26 지정),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3-6이 가옥은 육영수 여사가 1925년에 태어나 1950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으며 흔히 '교동집'이라 불려졌던 옥천지역의 명문가이다.1600년대부터 삼정승(김, 송, 민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1894년 전형적인 충청도지역 상류주택의 양식으로 축조되었다.그 이후 1918년 육 여사의 아버지 종관(鐘寬)씨가 매입하여 건물의 기단을 높여 개축하였는데 각기 독립된 아랫집, 큰집, 윗집, 사당 영역으로 구획
정지용 생가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5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시인의 - '향수(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의 작가 정지용 시인이 이 집에서 태어나 꿈 많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래서 옛 모습을 되찾아 생가를 복원하였다.1902년 음력 5월 15일 아버지 정태국·어머니 정미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당시 옥천 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일본 동지사
은진송씨정려각(恩津宋氏旌閭閣)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1993. 6. 21 지정), 대전 대덕구 법2동 205-5번지송씨부인(1575~1659)은 송담 송남수의 딸로, 시집간지 불과 몇 달이 안되어 남편이 죽은 후 친정 부모에 의지하여 아들인 김경여(金慶餘, 1596~1653)를 훌륭하게 키웠다.또한 송씨부인은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친정 아버지(송남수)가 노환으로 생명이 위급할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고, 손가락 뼈를 가루내어 먹임으로써 소생케 하였다고 한다.이러한 일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영조 때 정려(旌閭
송애당(松崖堂)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1989. 3. 18 지정), 대전 대덕구 계족로 589번길 39(중리동)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김경여(1597∼1653)가 지은 별당건물로, 고종 26년(1889)에 다시 지었다.그의 호를 따서 송애당이라 이름지었다.‘송애(松崖)’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김경여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구
동춘당 (同春堂)보물 제209호(1963. 1. 24 지정)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호 78(송촌동)동춘당은 송준길(1606~1672)의 아버지인 송이창(1561~1627)이 세웠으며, 당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1649년(인조 27) 송준길이 44세 되던 해에 자신의 호 '同春堂'을 따서 건축한 별당이다.동춘(同春)이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으로, '인(仁), 춘(春)을 구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선생은 이곳에서 독서와 교육을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우암 송시열 등과 함께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