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세종시 문화재자료 제10호 (2012. 12. 31 지정), 세종시 부강면 금호리 712-3동춘당 송준길(1606∼1672)의 후학들이 그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검담서원의 묘정비와 강학공간으로 이용했던 정자인 보만정이다.송준길은 조선 효종∼현종 때의 문신으로 예학에 매우 밝았다.보만정은 원래 현종 10년(1669) 동춘당 송준길이 학문을 연구하며 여생을 마치려고 이곳 검담에 세운 정자이다.숙종 20년(1694)에 송준길을 기리기 위해 검담서원을 세웠는데, 이 때부터 보만정은 검담서원의 강학공
갑사 동종보물 제478호 (1968. 12. 19 지정), 충남 공주시갑사동종(甲寺銅鐘)은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다. 높이 131㎝, 입지름 91㎝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하나의 몸체로 이어져 서로 반대로 머리를 돌린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부강 남성골산성세종시기념물 제9호,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 산 24 외 29필지남성골산성은 2001년 시굴조사와 2001년에서 2002년에 걸친 1차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내·외곽을 갖춘 목책성으로 확인되었다.정상부에서 바라보면 부강 시내와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남서쪽으로 계룡산, 북서쪽으로 조치원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전체적인 구조는 내곽의 성터 부분과 성터 북서쪽의 낮은 사면대지 부분, 동쪽의 능선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내곽의 전체 둘레는 약 300m이고, 능선 대지의 평탄부는 폭 16.5m, 길이 53.5m이다.정상부
팔괘정충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1978. 3. 31 지정),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번지팔괘정은 조선 인조 4년(1626)에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금강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왼쪽으로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건물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있고, 건물 뒤의 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글자가 있다.
임리정충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 충남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 20-8(황산리)조선 인조 4년(1626)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원래의 이름은 황산정이었으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구절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
영동 송시열 유허비충북도기념물 제46호(1977. 12. 7 지정),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정을 기리고, 그의 옛 자치(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우암 송시열 선생이 서재를 짓고
죽림서원충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1984. 5.17 지정), 충남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 20-8 (황산리)율곡 이이·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 등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이이(1536∼1584)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원리를 중시한 이황에 맞대어 경험을 중시했다.성혼(1535∼1598)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1996. 5. 30 지정),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부여 부소산성사적 제5호(1963. 1. 21),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쌍북리)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백남우 해설사]부소산 뒤쪽은 백마강이고 안쪽은 테뫼식 산성이 있었다.궁궐터는 부소산 앞쪽, 부소산은 평상시에는 왕족들의 내궁.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금산 칠백의총사적 제105호(1963. 1. 21 지정),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번지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21대 총선을 183일 앞두고 충남 홍성·예산의 국회의원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은 5명 정도로 알려졌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충남 홍성·예산은 여덟 차례의 선거에서 보수진영 후보가 모두 당선되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된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파란 물결이 몰아쳤던 지난해 6.13 지방선거까지 보수진영은 단 한 차례도 단체장을 빼앗긴 적이 없을 정도로 보수진영에서는 그야말로 충남 제일의 ‘聖地(성지)’로 손꼽는 지역이다.홍성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최측근 중 한 명으
영동 한천정사충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1999. 9. 15 지정),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동 1길 48우암 송시열(1607∼1689) 이 학문을 연구하며 지내던 집이다.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졔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후에 우암의 제사를 모시는 한천서원을 세웠었는데, 고종 5년(1868)에 서원을 철거하였고 후에 후학들이
21대 총선을 190일 앞두고 충남 당진의 국회의원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은 3명 정도로 알려졌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88년 13대 총선 이후 당진은 여덟 차례의 선거에서 보수진영이 일곱 차례의 당선을 기록할 정도로 절대적 우위를 보였으나,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등 대기업 생산 공장과 그에 따른 수많은 협력 업체들이 유입되면서 외지인들의 비중이 늘어나며 진보진영의 勢(세) 또한 만만치 않게 늘어나 지난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진보진영 후보가 최초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 바 있다.당진은 김현욱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
김익희의묘대전시 기념물 제5호 (1989. 3. 18 지정), 대전 유성구 대덕대로 507-150(가정동)김익희(金益熙:1610~1654) 선생의 자는 중문(仲文)이요 호는 창주(滄州)이다.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손자로서 인조 11년(163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을 지내는 동안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로 활약하였다.효종 때는 승지, 대제학 등을 지냈고, 벼슬이 찬서에 이르렀다.대전 대덕연구단지내 국립중앙과학관 뒤쪽 야산에 위치한 묘역은 선생과 부인의 묘를 비롯하여 그 일가의 묘역으로 조성되었다.묘의 왼쪽
21대 총선을 197일 앞두고 충남 논산·계룡·금산의 국회의원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인물은 5명 정도로 알려졌다. 소선거구제가 실시된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논산시·계룡시·금산군은 논산군과 금산군 선거구로 나누어져 1992년 14대 총선까지 선거가 치러진다. 1996년 15대 총선부터는 국회의원 인구하한선에 미달되는 금산군을 합쳐 논산시·금산군 선거구로 2000년 16대 총선까지 선거가 치러졌으며, 2003년 계룡시가 논산시에서 분리된 후 2004년 17대 총선부터는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선거구로 선거가 치러진 이후 현재
유회당(부)기궁재대전시 유형문화재 제6호 (1989. 3. 18 지정), 대전 중구 운남로85번길 32-20 (무수동)유회당과 기궁재는 권이진(1668∼1734)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과 그에 소속된 재실로 보문산 남쪽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품고 싶다는 뜻을 지닌 ‘유회(有懷)’는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유회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건물로 활수담이라는 작은 연못 뒤쪽에 있다. 앞면과 양쪽 면에 난
21대 총선을 204일 앞두고 충북 증평·진천·음성의 국회의원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인물은 4명 정도로 알려졌다. 증평·진천·음성은 소선거구제가 실시된 1988년 13대 총선 당시 진천·음성 선거구로 선거가 치러진 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구 인구하한선에 미달되는 괴산이 합쳐지고, 2003년 괴산에서 분리된 증평이 추가되면서 2004년 17대 총선부터는 증평·진천·(괴산)·음성 선거구로 선거가 치러진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구 인구하한선에 미달되는 보은·옥천·영동에 (괴산)이 편입되는
유회당판각대전시 유형문화재 제20호(1991. 7. 10 지정), 대전시 중구이 책판은 유회당 권이진(1668∼1734) 선생의 문집을 새기기 위해 만든 판목이다.권이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외손자이다. 권이진은 169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당쟁으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다.172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민간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과 공물을 정해진 액수 이상으로 거두지 말 것 등을 건의할 만큼 성격이 곧고 강직하였다. 이 문집에는 시와 소(疏:상소글) 등이 실려있으며, 유회당 선생이 관직에 있던
21대 총선을 211일 앞두고 충남 서산·태안의 국회의원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은 4명으로 알려졌다. 서산·태안은 전통적으로 보수진영의 우세 속에서도 진보진영 후보자가 당선되는 기현상이 자주 빚어진 지역이다. 소선거구제가 실시된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재선거를 포함한 아홉 차례의 선거에서 진보진영 후보의 당선은 네 차례에 해당될 정도로 당선자만 단순 비교할 때는 보수진영에 밀리지 않는 지지세를 보였다. 또한 서산·태안은 13대 총선 이후 재선거를 포함한 아홉 차례의 선거에서 서산 출신이 6차례, 태안 출신이 3차례의 당선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보물 제802호(1984. 11. 30 지정),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마곡사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승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이 건물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해탈문·천왕문과 일직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