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H-60은 세계 최우수 헬리콥터1991년 7월, 대한민국 육군의 미래 주종 헬리콥터, 세계 최신예기로 미국에서 UH-60을 도입하여 육군참모총장이 최초로 운항하게 되어 있었다. 서울∼계룡대 간에 25분이 소요되며 쌍발 엔진으로 바다에 불시착해도 장시간 생존 가능한 고가의 장비다. 도입 전 미국회사 시험 비행사 8명이 도착해 3개월간 한국조종사와 합동 운항토록 되어 있었다.1991년 8월, 서울 출장차 수행원들과 육본 헬기장에서 이륙하려는 순간, 미 조종사가 엔진 2개 중 1개의 이상으로 운행불가라는 보고를 했다. 즉시 리스카시 연
염해(鹽害)란 나트륨, 마그네슘, 칼슘 등을 함유한 염분이 농작물, 건축물, 시설물 등에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해안지역이나 간척지 등에서 주로 발생한다.염해는 크게 바닷물에 의한 염수해와 바닷바람에 의한 염풍해로 나뉜다. 염수해는 만조 때 바닷물이 범람하거나 가뭄에 의하여 하천유량이 감소하였을 때 주로 나타나고 염풍해는 태풍이나 돌풍 등 바람에 실려 온 해수의 입자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정부는 농지법 개정을 통해 지난해 7월 1일부터 이 같은 염해지역 간척농지의 원상복구를 전제로 최대 20년 동안 태양광발전소를 운영할 수 있도
군인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국가가 위태로울 때 생명을 요구받는 순간이다.- 이진삼 - 제28대 육군참모총장장군 11년 만에 1990년 6월, 제28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한 지 36년 만이었다. 계룡대 연병장을 사열하는 내 머릿속엔 지난 수십 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임무 위주의 육군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내외의 어떠한 도전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이 땅의 평화를 지켜나갈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가꿔온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사령관님, 땅굴 각도가 잘못됐습니다.”현장 작업에 참여했던 업체에서 적외선 빔을 잘못 건드려 각도가 위를 향한 바람에 아래로 뚫어야 하는 땅굴이 위로 올라갔다고 했다. 다시 밑으로 꺾기 위해서는 다른 장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조치할 수 있나, 박 장군!”나는 박 장군의 눈빛을 보며 물었다.“네, 할 수 있습니다, 사령관님!”할 수 있다는데 다른 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염려 마라. 불가능은 없다. 최선의 방책을 강구하자.”나는 무엇이든 일단 맡기면 그것으로 끝이다.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불가능은 없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성공의 근본이다.-이진삼배경“하나의 갱도(땅굴)는 열 개의 원자탄보다 낫다. 1975년 10월 10일까지 관통, 노동당 창설 30주년까지 전방 지역에 요새화된 적의 진지를 무력화시켜라.”1971년 9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땅굴 굴착 전투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곧 요새화된 남한의 훼바, 알파, 브라보, 찰리 등을 자신들이 판 땅굴을 통해 1시간 내에 8km 이상을 강행 돌파함으로써 우리의 주 병력이 진지 FEBA(전투지역의 선단) 점령 전에 선점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북한은 1
농업이란 무엇일까?동양에서 농업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한 마디로 대변된다. 즉, 농업이 세상의 가장 큰 근본이라는 것이다.서양에서 농업은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수렵과 함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그래서 영어로 ‘농업(Agriculture)’은 ‘문화(Culture)’와 어원이 유사하다. 농업이 인류문화의 시작이라는 것이다.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상승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맞이한다. 뗀석기보다 정교하고 날카로운 간석기가 등장하고 생산물을 저장 보관하기 위한 토기
진위(眞僞) 구별법1989년 4월 6일, 참모차장의 자리에 보직된 지 9개월 만에 노태우 대통령은 나를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러면서 서부전선인 용인의 3군사령부로 발령을 내겠다고 했다. 나는 서울 인근에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주에 있는 1군사령부는 산악3군단과 21사단이 휘하에 있다.“정호근 장군은 임기가 다 됐으니까 1군으로 제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3군사령부는 간 지 4개월밖에 안 됐으니까 보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그때 만약 내가 노 대통령의 뜻대로 3군사령관으로 부임해 갔다면, 앞선 사령관은 임기 전에 옷을 벗어
대우 김우중 전 회장이 지난 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경제 발전을 이끈 세계 경영의 길을 걸어온 故 김우중 회장의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는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필자가 그를 만난 것은 1980년대 새마을운동 활발히 하던 때였다. 그 당시 서산-당진 간 도로 공사를 대우가 맡아 시공했다. 현장 K소장이 나를 찾아왔다. 김우중 회장님 모친이 상을 당했는데, 장지가 태안 인평리(인평리 2구)라면서 현지를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그곳에 도착하니 대우 계열사 임원들이 나와 있었다. 큰 도로에서 장지까지 가는 통행이 문제였다. 농로가
대전광역시 체육회장이 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종전까지는 지방단체장이 체육회장직을 당연직으로 겸직했다. 이러한 제도를 바꾼 것은 정치와 체육을 분리하자는 취지에서다.그동안 지방선거 때마다 지방체육회가 특정 후보의 선거조직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국회는 이러한 여론을 수렴하여 지방자치단체장이 체육회장을 겸직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만들어 선거제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체육회장을 선거를 통해 뽑는 것은 민주주의체제에 부합하는 제도이다.과거에는 체육을 진흥시켜 국위를 선양하자는 취지에서 관(官) 주도로
보안사령관 안 하겠습니다1988년 1월과 2월,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는 연희동 자택으로 나를 불러, 보안사령관직을 맡을 것을 두 번에 걸쳐 권유했다.“저는 보안사령관 안 하겠습니다. 제가 보안부대 8년, 정보사령관 2년, 10년간이나 정보계통에 있었습니다. 저는 야전(전투) 지휘관 하겠습니다.”“박준병 장군 보안사령관 했는데 후에 어떻게 되었지?”“1979년 10·26 때 20사단장으로 서울 태릉으로 출동했다가 보안사령관 끝내고 예편, 민정당으로 충북 보은·영동·옥천군 국회의원을 하고 있습니다.”“안필준 장군은?”“6군단장 끝내고
산악 3군단장★★★1987년 1월 13일, 중장으로 진급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나를 서울 거여동에 있는 공수특전사령관으로 내정했다. 나는 참모총장을 방문하여 말했다.“저는 9공수참모장과 9공수여단장을 했습니다. 전방 군단장으로 보내주십시오.”“어제 대통령께 결재 올리면서 결정했는데 어떡하나?”“총장님, 고생은 되겠지만 저는 많은 병과를 지휘 통솔하는 정규 군단장을 하겠습니다. 보병, 포병, 공병, 기갑, 통신 등 정규 작전 부대를 지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21사단과 12사단 지역 땅굴을 발견하겠습니다.”“정 그렇다면, 전화로 보고하
남조선 최고의 악질내가 초급장교인 대위와 소령 시절 많은 적을 잡은 내용이 언론에 노출된 후, 장군이 되어 전방 지휘관으로 보직될 때마다 북괴는 확성기 방송을 통해 노골적으로 ‘남반부 장병을 괴롭히는 이진삼’이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장병들도 대응방송을 했다. 휴전선에서는 북한군이 종종 아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사단장인 내가 책임지겠다.’며 몇 십 배의 대응사격으로 북괴군의 기를 꺾어놓았다. 1988년 1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전금철은 평양에서 가진 내
저 이름 모를 산과 들에서 적과 싸우다 쓰러질 적에 다친 상처를 싸매주고 물을 먹여 주며 마지막에는 시체를 거두어 주는 것도 전우임을 인식하여 철석같은 단결을 하여야 한다.병사들은 “소대장님, 분대장님, 위험합니다. 조심하십시오.” 하면서 눈을 감는다. 이 때 옆에는 형제와 부모님이 계시지 않고 오직 전우만이 있을 뿐이다.- 이진삼 - 최초 사단장★★참모총장 황영시 장군은 사단장 결정이 되자 총장실로 나를 호출하였다.1980년 7월 29일, 사격지도단장을 마치고 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보직 받은 지 28개월 후인 1982년 12월 6일
서울의 봄1980년 봄, 소위 ‘서울의 봄’이라 일컫던 분위기는 점점 냉정을 잃어갔다. 1980년의 봄은 5·17 계엄령 확대로 이어졌다. 당시의 국내 상황을 안일하게 보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국가안보에 관계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만 부르짖었지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정치인들은 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선동하고 부추겨 혼란을 가중시킬 뿐 수습하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백제는 곧 충청이다”. 서기 475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했을 때부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할 때까지, 백제는 바로 충청이었다.부흥운동 3년을 포함해 총 19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충청백제’는 중국 남조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남해 건너 왜국에까지 활발하게 통섭, 경영했다. 특히 돋보였던 문화적 역량은 통일신라와 왜국으로 이어졌다. 특히 일본 아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가 백제 후손에 의해 세워진 것을 기념할 정도로 서남부일본에 남은 백제의 영향은 지대하다.백제의 원혼을 기리는 수륙제가 1955년 백마강변에서 시작되
구제(救濟)1979년 12·12 오후 7시 40분, 정승화 참모총장 내외와 이재천 소령은 한남동 총장 공관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부관 황진하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그때였다.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 보고 건이 있어 공관을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남동 공관으로 대령 몇 명과 수사관들이 방문했다. 그때 수행 부관이었던 이재천 소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과의 통화를 연결 중이었다. 순간, 권총 2발이 전화를 걸고 있던 이 소령에게 발사되었다.
혼돈의 시기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을 완수한 후 민정에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고 공약을 했다. 국력을 키우고 부강하게 만든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집권 기간의 절반 즈음에 유신헌법을 만들어 나라를 더 발전시키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유신’이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직접선거제’를 ‘간접선거제’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7년 후 유신체제는 무너졌고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1979년 10월 18일, 경제가 침체된 부산과 마산에서는 참다못한 시민들이 봉기했다. 이른바 ‘부마항쟁’으로 일컬
발탁나는 1978년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사단에서 주관하는 대대 ATT를 받고 있는 2대대(중령 조영길) 훈련장을 위문차 방문하고 있었다. 그때 사단장으로부터 급히 사단장 공관으로 오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테니스 하자는 호출로 알고 부대에 연락하여 운동복을 포함, 운동 준비를 하여 사단장 공관 테니스 코트로 가져올 것을 지시하고 사단장 공관으로 갔다.“여보 61연대장, 축하해요. 배병노 장군 후임으로 사격지도단장으로 명령이 났소. 연대장 후임자는 당신 동기생 방서남 대령으로 명령 났소.”“안 가면 안 됩니까?”“왜?”“연대장
전방 연대장1977년 8월 4일, 전방 20사단 6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군에서는 연대장과 사단장을 가장 보람 있는 지휘관이라고 해서 흔히 ‘지휘관의 꽃’이라 부르곤 한다. 그만큼 연대장은 지휘관으로서는 최고의 직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연대장으로 간 20사단은 전방 GOP사단이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곽영배 장군이 참모총장의 결재를 받아놓았다. 곽 장군은 내가 보안사에서, 참모장으로 모셨던 분이다. 내가 올렸던 결재를 한 번도 반려하거나 부결시킨 적이 없을 만큼 나에 대한 신뢰가 돈독했다. 내가 대대장으로 나가기 전, 육군대
세상 살다보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이한 나라를 경험하게 된다.집권당이 정부권력의 상징인 대검찰청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는 조국(曹國) 수호와 검찰개혁인데, 조국 수호는 대통령 권한이니까 청와대 앞에서, 검찰개혁은 조국만이 할 수 있으니까 조국의 사무실 앞에서 소리질러야 마땅한 일이다.번지수를 잘못 짚고 있다.여당은 고작 5~6만 명의 집회인원을 200만 명 이상이라고 뻥튀기 하면서, 봐라! 이것이 국민의 함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민의 뜻은 이미 조국 가족을 수사할 때 결정되었다.보수야당이 개천절 날 광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