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미륵대원지 석등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1978. 12. 21 지정),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6번지월악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괴산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괴산미륵리오층석탑(보물 제95호)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상·중·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둘렀다.가운데기둥은 적당한 높이에 간결한 모습이다.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1963. 1. 21 지정),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6번지높이 6m의 오층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받침돌과 기단을 만든 후 초층탑신석을 올려 놓았다.바위 안쪽은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이 석탑이 남아 있다.기단 하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시기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있다.탑신(塔身)은 1층
보문산성대전시 기념물 제10호 (1989. 3. 18 지정), 대전 중구 대사동 산3-45번지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해발 406m) 정상 부분의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는 300m이다.성벽은 자연지형에 따라 간단하게 다듬은 네모난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성벽 바깥면은 조금씩 안쪽으로 둘러쌓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암반으로 형성된 동쪽과 북쪽의 급경사면에는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발굴조사 결과 남문터가 확인되었고, 현재 통행로로 사용되는 북문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성문폭을 좁혀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삼릉계곡선각육존불경북 유형문화재 제21호(1972. 12. 29), 경북 경주시 남산순환로 341-126 (배동)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이 2구의 마애삼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1980. 6. 11 지정),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2-6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자리잡고 있다.얼굴은 원만하고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의 옷주름선은 간결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허리는 가늘고 앉은 자세는 안정감이 있다.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상대에는 화려한 연꽃무늬를 조각하
논산 관촉사 석등보물 제232호(1963. 1. 21 지정), 충남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 (관촉동)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가운데받침은 각이없는 굵고 둥그런 기둥으로 세웠는데, 위아래 양끝에는 두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줄기의 띠를 둘렀다.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
연산아문충남도 유형문화재 제9호(1973.12.16 지정), 충청남도 논산시 황산벌로 1528-7 (연산면)조선시대 연산현의 관아를 출입하던 정문이다.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누각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아래층은 각 칸마다 문을 달아 통행로로 이용하였고, 위층은 누마루로 4면에 난간을 둘렀다.정문 앞쪽에 있는 누각 아래 기둥 4개는 장주초석이 받치고 있다.연산아문은 지금 남아있는 조선 후기 관아건물 중 대표적인 양식의 문루이다.
흑석동산성대전시 기념물 제15호 (1990. 5. 28 지정), 대전 서구 봉곡동 산26-1번지대전광역시 서구에 봉곡동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에 있는 산성이다. 백제 때 산성으로 산봉우리를 둘러 쌓은 형태이며, 둘레는 470m에 달한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바깥쪽 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을 채우는 방법으로 만들었다.남벽은 해발 185m의 능선에 만들었고, 문터는 남문터만이 남아 있는데 그 폭은 2.8m 정도이다. 남벽은 서쪽 성벽 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조금 올라온 뒤 꺾여져 북쪽 성벽으로 이어진다. 북쪽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2018. 4. 20 지정), 충남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968년경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이번에 고려시대 신앙과 불교조각사에 있어서의 위상을 재평가 받아 국보로 승격하게 되었다.석불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용화회소(龍華會䟽)」를 비롯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1981. 3. 18 지정), 충북 충주시 감노로 2319 (중앙탑면, 충주고구려비전시관)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1962. 12. 20 지정),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
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세종시 문화재자료 제10호 (2012. 12. 31 지정), 세종시 부강면 금호리 712-3동춘당 송준길(1606∼1672)의 후학들이 그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검담서원의 묘정비와 강학공간으로 이용했던 정자인 보만정이다.송준길은 조선 효종∼현종 때의 문신으로 예학에 매우 밝았다.보만정은 원래 현종 10년(1669) 동춘당 송준길이 학문을 연구하며 여생을 마치려고 이곳 검담에 세운 정자이다.숙종 20년(1694)에 송준길을 기리기 위해 검담서원을 세웠는데, 이 때부터 보만정은 검담서원의 강학공
갑사 동종보물 제478호 (1968. 12. 19 지정), 충남 공주시갑사동종(甲寺銅鐘)은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다. 높이 131㎝, 입지름 91㎝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하나의 몸체로 이어져 서로 반대로 머리를 돌린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부강 남성골산성세종시기념물 제9호,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 산 24 외 29필지남성골산성은 2001년 시굴조사와 2001년에서 2002년에 걸친 1차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내·외곽을 갖춘 목책성으로 확인되었다.정상부에서 바라보면 부강 시내와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남서쪽으로 계룡산, 북서쪽으로 조치원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전체적인 구조는 내곽의 성터 부분과 성터 북서쪽의 낮은 사면대지 부분, 동쪽의 능선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내곽의 전체 둘레는 약 300m이고, 능선 대지의 평탄부는 폭 16.5m, 길이 53.5m이다.정상부
팔괘정충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1978. 3. 31 지정),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번지팔괘정은 조선 인조 4년(1626)에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금강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왼쪽으로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건물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있고, 건물 뒤의 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글자가 있다.
임리정충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 충남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 20-8(황산리)조선 인조 4년(1626)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원래의 이름은 황산정이었으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구절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
영동 송시열 유허비충북도기념물 제46호(1977. 12. 7 지정),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정을 기리고, 그의 옛 자치(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우암 송시열 선생이 서재를 짓고
죽림서원충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1984. 5.17 지정), 충남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 20-8 (황산리)율곡 이이·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 등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이이(1536∼1584)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원리를 중시한 이황에 맞대어 경험을 중시했다.성혼(1535∼1598)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1996. 5. 30 지정),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부여 부소산성사적 제5호(1963. 1. 21),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쌍북리)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백남우 해설사]부소산 뒤쪽은 백마강이고 안쪽은 테뫼식 산성이 있었다.궁궐터는 부소산 앞쪽, 부소산은 평상시에는 왕족들의 내궁.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