尊敬(존경)하는 長官(장관)님!오늘 參席(참석)하신 第(제)7代(대) 白善燁(백선엽) 總長(총장)님, 第(제)19代(대) 徐鐘喆(서종철) 總長(총장)님, 第(제)20代(대) 盧載鉉(노재현) 總長(총장)님, 第(제)23代(대) 李熺性(이희성) 總長(총장)님, 第(제)26代(대) 朴熙道(박희도) 總長(총장)님, 그리고 韓美(한미) 聯合司令官(연합사령관) 리스카시 大將(대장)! 內外貴賓(내외귀빈) 여러분!38年前(년전) 護國(호국)의 干城(간성)이 되고자 陸軍士官學校(육군사관학교)의 門(문)을 같이 두드렸던 陸士(육사) 同期生(동기생)
오늘 이 뜻 깊은 자리를 主管(주관)하여 주시는 國防部長官님! 歷代(역대) 總長(총장)님! 그리고 內外貴賓(내외귀빈) 여러분께 感謝(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아울러, 어려운 與件(여건)속에서도 많은 業績(업적)을 남기고 轉役(전역)하시는 李鍾九(이종구) 前任總長(전임총장)님께 깊은 敬意(경의)를 表(표)하는 바입니다.親愛(친애)하는 陸軍(육군) 將兵(장병), 軍務員(군무원) 그리고 豫備軍(예비군) 여러분!本人(본인)은 오늘 國家安全保障(국가안전보장)의 前衛(전위)인 精銳陸軍(정예육군)의 指揮權(지휘권)을 引受(인수)함에 있어, 所任
第1, 2, 3 땅굴에서 確認(확인)한 바와 같이 北傀(북괴)는 全(전) 前線(전선)에 걸쳐 71年末(년말)부터 땅굴을 掘設(굴설)하기 시작하여 76年末(년말)까지 集中的(집중적)으로 工事(공사)를 實施(실시)해온 것으로 判斷(판단)됨으로 앞으로 探査活動(탐사활동)은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 남쪽 1km 以內(이내) 地域(지역)에 集中(집중)할 必要性(필요성)이 要求(요구) 되었으며, 豫想(예상) 軸線(축선)도 正確(정확)한 入口(입구) 地点(지점)을 再確認(재확인)하고, 이 地域(지역)에 이르는 基点(기점)이 될 만한 地形(지형)을
歸順者(귀순자), 陳述諜報(진술첩보), 敵戰術(적전술), 入口(입구), 豫想地域(예상지역)의 敵(적) 活動(활동)을 綜合(종합) 分析(분석)한 結果(결과) 東部前線(동부전선) 山岳地域(산악지역) 重要(중요) 軸線上(축선상)에 南侵用(남침용) 땅굴을 構築(구축)해 놓고 있다는 指揮官(지휘관)의 確信(확신)과 1군에서 제4 땅굴을 기필코 찾고야 말겠다는 全將兵(전장병)의 끈질긴 執念(집념)과 努力(노력)의 結實(결실)이었음.前方部隊(전방부대)에서 땅굴 조사 探査(탐사)를 위해 80年度(년도)에 굴착한 試錐孔(시추공)을 10年(년)이 지
대남 적화 통일의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북괴는 무력남침의 호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1965년부터 단계적으로 무장간첩을 전후방에 침투시켜 중요시설 파괴와 요인암살을 획책하는 등 민심을 교란시키고 대한민국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데 총역량을 집중하였다.이러한 북괴의 대남전술은 1966년도 정찰단계를 거쳐 1967년도에는 행동단계로 옮겨 전방지역에서의 빈번한 도발행위와 아울러 후방지역에 무장간첩의 직접적인 대량침투를 획책하더니 1968년에 들어서자 급기야 청와대 기습사건인 1·21사태와 11월 1일 울진 삼척 및 서해안 지역에 1
이진삼 그의 일생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삶의 연속이었다. 국가를 위하여 싸우자고 함께 다짐했던, 전우들을 먼저 간 전우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용서를 빈다. 차라리 그가 적의 흉탄에 쓰러졌다면 영광스러운 마지막이 되었을 것이라고 표현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정의롭게 살고자 노력했던 그의 군 생활은 파란만장 그대로였다. 부하들에게 강력한 교육훈련과 전투진지 요새화 등 많은 것을 강조하고 요구한 것은 지휘관 본연의 자세다.변화무쌍 세상 속에서 그의 애국심은 만고불변할 듯하다. 본인은 “머리 안 좋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미국 CNN 방송은 2015년 8월 25일 미군 당국이 북한군의 움직임을 토대로 기존의 한반도 전시 작전계획을 재검토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미군 위성 정보 등에 따르면 북한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중 가장 우려하는 것은 동해와 서해에 흩어져 있던, 전력의 70퍼센트에 해당하는 북한 잠수함 50척이 일제히 한미 감시 레이더망에서 사라진 대목이다. 물론 이 중 일부는 남북합의 후 원위치로 돌아간 것으로 파악됐지만 상당수는 행방이 묘연하다.북한은 2015년 5월, 신형 잠수함
가장 취약한 안보환경의 대한민국“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손자병법의 한 구절로 최선의 국방정책은 전쟁을 예방하는 것임을 강조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방정책은 남과 북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광복 직후 우리는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는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인구의 10분의 1이 죽고 다치는 처참한 6·25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지금은 비록 총성이 멎은 정전 상태지만 안보 위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전쟁을 경험했던 세대로서 역사의 교훈과 안보의 중요성을 후대 국민
아프간 파병 동의안2010년 2월, 여야 간 극한 대립으로 갈등을 빚고 있을 때 나는 주도적으로 앞장서 아프간 파병 동의안에 대해 국방위원회 통과를 이끌어냈다.“이미 68,000명의 병력을 아프간에 파견하고 있는 미국이 2010년 6월까지 신속하게 30,000명을 추가 파병하여 아프간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고자 하는 만큼, 우리도 제대로 된 병력을 보내어 국제 공조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소신을 폈다. 그래야만 향후 발생할지도 모르는 한반도 위기 상황에 우방들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명분을 쌓는 것임을 강력히 주장했다.이밖에도
국회 입성2008년 4월, 1993년 2월 체육청소년부장관을 그만둔 지 15년 만에 18대 부여·청양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주변에서 내게 아무리 국회의원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았다. 꼭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없었다. 군 생활 하는 내내 정치권의 유혹이 있었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국회의원이 되려고 했던 것은 잃어버린 국방 10년과 지역 발전 때문이었다.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으로 인해 허물어진 안보가 걱정되었다. 공직을 그만 둔 야인으로선 아무리 안보를 떠들어도 공염불이었다. 신문 한 줄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세규 국회의원의 사과장군 출신으로 야당의 국회의원이었던 이세규(육사 7기 특기) 의원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까지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나를 향해서도 방첩부대 특공대장 시절에 있었던 1965년 동아방송 조동화 사건과 연계해 1971년까지 6년간을 국회에서 질의했다. 그러다 나와 무관하다는 것을, 취급했던 검사로부터 확인하고 남자답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내게 정중히 사과하였다.1991년 5월 28일, 육사 7기 동기생 회원들과 함께 계룡대 육군본부를 방문했을 때 참모총장인 나를 별도로 찾아와 두
브레이크 없는 벤츠2005년 초, 나는 칠순의 문 앞에서 천성관 검사에게 편지를 띄웠다. 억울함으로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 그리고 경제적 손실과 명예 실추를 떠안고 산 지 12년이 경과한 즈음이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권력에 무릎 꿇고 자기 출세를 위해서 사건 조작을 하는 천성관 검사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김용원 변호사가 쓴 《브레이크 없는 벤츠》를 보면 새파란 검사의 열정에 사사건건 정치검사의 참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천 검사 또한 그저 출세하기 위해 권력에 빌붙은 권력의 노예, 황금의 노예, 향락
신속 재판참고인 자격에서 피의자로 45일 만인 1993년 9월 15일, 서울 서초동 서울형사지법 조○○호. 용기 없는 판사는 거대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확실한 증거도 없으며 증인도 없는 가운데 유죄 판결을 내렸다. 사건 핵심 주범인 박동준 장군은 미국으로, 천성관의 경기고 선배인 한진구 장군은 국내에서 도피한 가운데 판사는 서둘러 내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방청석의 야유와 웅성거림 속에 나를 석방했다. 45일 만에 급하게 재판하고 석방한 것은 의문이다. 도피한 피의자 2명을 조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할 수 있는가.
참고인에서 피의자로1993년 7월 31일, 참고인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검에 도착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언론사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며 질문을 하는 기자들 앞에 서면서 인권 찾는 김영삼이 눈에 어른거렸다. 해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나 그 믿음은 곧 무너졌다. 공안1부 903호실의 담당 검사 천성관을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내가 21사단의 사단장일 때 중위로 군법무관을 했던 부하였다. 사건을 조작, 언론 플레이를 통해 국민에게 알린 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든
이것이 민주주의인가군인이 목숨 바쳐 싸우는 것은 민주주의 수호와 국민의 재산을 지키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특정인의 권력 유지 차원의 충성이 아니다. 수사기관에 불려가 본 사람은 구속과 불구속의 차이를 절감한다. 결과가 어떻든 ‘일단 구속하고 보자’는 검찰의 권력 남용으로 인한, 생명보다 소중한 명예의 훼손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구속은 수사편의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일단 잡아넣고 심리적 압박을 가해 쉽게 자백을 받아 내려는 의도다. 수사편의주의는 우리 헌법에 반한 행위다. 우리 헌법에서는 ‘유죄 확정까지 피의자는 무죄로
YS는 안 됩니다6공화국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노 대통령의 가장 큰 고민은 후계자였다. 이전인 1990년 1월 22일, 여소야대의 정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JP(김종필 총재), YS(김영삼 총재), TJ(박태준 최고위원)가 3당 통합을 한 후부터 이어진 고민이었다. JP는 젖혀 두고 YS냐, TJ냐를 따졌다. 한번은 내게 의중을 물어오기에 “YS는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는 YS의 측근인 최형우 정무장관이 나를 찾아와 “이 형, 도와주세요. 대통령께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우리 집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사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의 활성화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되어 제일 먼저 내건 목표는 전국 각지의 생활체육 활성화와 청소년 육성 시설의 확대가 절심함을 느꼈다. 게이트볼 등 체육시설 10개가 노인병원 20개의 효과가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현재는 생활체육협의회를 대한체육회가 합병하여 관리하고 있다. 당시는 국위를 선양하는 올림픽을 위한 대한체육회를 필두로 한 엘리트 체육과 국민생활체육협의회를 활성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각 지방 단위로 청소년 훈련 시설과 일반 국민의 생활체육 활성화에 대한 수요를 정책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인간이 가장 행복한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진삼 -체육청소년부 장관“가족과 함께 테니스 라켓을 가지고 청와대 체육관으로 내일(1991년 12월 11일) 오후 3시까지 들어오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이현우 청와대 경호실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우리가 청와대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대통령과 영부인은 테니스 선수들과 몸을 풀고 있었다. 운동 후 저녁식사를 하면서는 군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노 대통령이었다.“군 생활이 좋아. 강등해서 사단장 하라면 다시 하겠다. 군대가 제일 좋아
회장님, 고맙지만1991년 10월 오전 9시 태릉에서 골프 약속이 있었으나 오전 강수량이 20mm를 넘었고 오후에는 폭우 경보 발령까지 내려서 아침 7시경 취소하였다. 때마침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내흔 친구가 바람 쐬러 가자고 하여 어디론가 같이 갔는데 종로구 청운동의 현대그룹 왕회장 댁이었다. 정 회장은 백색 마스크를 벗으면서 “젊을 때 새벽 찬 공기를 마시며 일을 하다 보니 감기 면역성이 떨어져 조심하고 있다.”면서 독감이나 유행성 감기가 아니기 때문에 전염 걱정은 없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1개월 전 한강 수해 당시 행주대교 건
교육지상(敎育至上), 중앙 심사부대의 우열은 간부의 우열에 비례한다.- 이진삼 -1990년 9월, 육군대학 초도순시차 방문했다. 순시를 마치고, 강당 연단 위에 내가 볼 수 있도록 1972년 1월 23일에 졸업한 나의 육군대학 성적이 놓여 있었다.“육군대학총장이 나를 기분 좋게 하려고 졸업성적을 갖다 놓았는데 내가 왜 성적이 좋았는지 교관들에게 물어보겠다. 답변을 듣고 싶다.”몇몇 교관들이 일반론적인 답변만을 하니 대학총장이 “답변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상금 걸어 놓았는데! 내가 머리가 좋았기 때문도 아니고 교관들에게